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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Dec 10. 2021

십자가와 부적이 공존하는 우리 집

천주교 신자인 여자와 불교 신자인 남자가 만났을 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성당에 다녔다. 매주 일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미사를 드렸고 친구들과 교리 공부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성당을 다니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야 천주교 외에도 기독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종교를 선택하는 일 없이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워낙 아이를 좋아해서 대학생 때 초등부 교리 교사가 되었다. 주말에 성당에 가는 것은 물론 주중에도 성당에 가서 일을 했고 신부님, 수녀님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렇게 나의 청춘을 성당에 보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수가 389만 명(7.9%)으로 제일 적고, 기독교 신자수가 967만 명(19.7%), 그리고 불교신자가 7616만 명(15.5%), 그리고 종교 없는 사람들이 2749만 명(56.1%)이라 한다. 그러니 내가 만난 남자 친구들은 대부분이 종교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천주교 신자인 남자 친구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불교 신자인 지금의 남편이다. 처음에 남편은 나를 안심시키고자 했는지 본인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시어머니는 절에서 살다시피 하시고 시아버지는 불교 공부를 하시던 분이었다. 처음에 남편의 집에 갔을 때 우리 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적잖게 놀랐다. 시어머님은 절에서 입을 법한 옷을 입고 계셨고 라디오에서는 불교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남편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십자가가 걸려있고 성모상이 세워져 있으니 처음 왔을 때 남편도 비슷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천주교를 좋아해. 수녀님들도 너무 좋으시고. 내가 잘 알지. 난 천주교 신자들은 좋다고 생각해”

 시아버지가 처음 나에게 건넨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나에게 불교를 강요 하시진 않을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가끔 드라마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다행히 우리는 갈등 없이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게 결혼한 우리 집은 십자가와 부적이 공존한다. 엄마가 주신 십자가를 나의 화장대 위에 걸어 놓았고 아버님이 주신 부적과 그림들이 집안 곳곳에 있다. 가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면 신기해한다. 어떻게 두 종교가 한 집안에서 공존하냐고.


 아마 둘 다 그렇게 독실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나와 남편의 부모님은 모두가 본인의 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으나 나와 남편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서로 그만큼 강요하지도 않는다. 남편은 주말에 우리 엄마가 성당에 미사 드리러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가서 1시간 미사를 같이 봤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뭐가 부족한지, 손서방은 언제 영성체 받을 거냐며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껏 말씀하신다.

 반면 나는 차례와 제사를 다 절에 가서 지낸다. 딱히 불편함은 없다. 나 또한 불경 외울 때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니까. 내가 성가를 들으면 편해지듯 남편은 불경 소리를 들으면 편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가끔 종교가 헷갈리는지, 절에서 스님을 만났는데 두 손 모으고 ‘아멘’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때 스님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평온하게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함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철학관에 다니면서부터이다. 몇 년 전 아홉수라 그런지 좋지 않은 일이 자꾸 벌어지고 정신적으로 힘들다며 부모님이 다니던 철학관에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철학관을 믿지 않지만 남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것이 더 우선이었기에 다녀오라고 했다. 집에 온 남편은 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지금 아홉수인 데다가 삼재가 꼈다며 부적을 가지고 왔다며, 지갑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는 것이다. ‘이 부적이 나를 지켜준데.’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세상이 지금 어떤 세상인데 이 부적 한 장이 당신을 지켜준다고?라고 마음속으로 소리 질렀지만, 그냥 웃고만 있었다. 부적 값을 듣고는 더 웃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남편도 믿는 그 무언가가 있어서 마음이 평온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 아홉수니까, 삼재니까,라고 한 번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참 후 다시 남편은 철학관에 가야겠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나와 남편이 세운 법인 회사가 이름이 안 좋아서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법인 회사 이름을 받아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충격이 왔다. 아이들 이름도 철학관에서 아버님이 받아 왔는데 그것까지는 이해를 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데 회사 이름이 좋지 않아서 지금 잘 안 되는 것이라고? 철학관에서 이름을 받으면 다 잘될 거라고?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어디까지 내가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 마음이 편한 거라면, 이라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결국 철학관에서 받아온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그것도 거금의 돈을 들여서 말이다. 


 이제 끝이겠지, 생각하던 찰나에 또다시 남편이 철학관에 가야 된다고 말했다. 올해 삼제가 나가는 해라서 다시 부적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도대체 그렇게 부적만 받아서 다 잘 될 거면 이 세상 사람들 다 부적을 받아서 다 잘 살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지 종이 쪼가리를 믿고 살 거냐고 안 내던 화를 했다. 나는 내가 이해심이 많고 쿨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부적의 금액이 처음 만든 부적의 배가 넘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은 결국 다시 부적을 받아 왔다. 아홉수 때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남편은 부적 때문에 그 정도로 끝이 났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 부적으로 회사 일도 잘 풀리고 사업으로도 돈을 많이 벌거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넉넉하지 않은 우리 형편에 늘 아끼며 살자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던 남편이 철학관 앞에서 모든 기준이 무너진다는 것에 서운하기도 했다.


 앞으로 지금까지 지켜온 종교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종교를 접하게 해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하다. 물론 나처럼 천주교 신자가 되길 바라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게끔 하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택을 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왠지 내가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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