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 : 릴 이야기 - 01화

테일큐브, 바드 단테, 단편, 이야기, 소설

by 바드 단테

▶ 예전에 적었던 짧은 이야기입니다.

마땅한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주인공의 이름으로 대신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야기의 프롤로그 부분으로 사용해 보려고 시작했다가 별도의 단편이 되었습니다.




◇ Prologue 1 - 1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헌책방이기 때문이다. 낡은 조끼에, 그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돋보기안경을 쓴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 그런 헌책방이다. 이곳에 오면 마치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다. 짙은 체리톤의 나무 책장사이로 잘 정리된 책들이 좋았다.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길 때, 피어오르는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정겹다.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낡은 종이의 질감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곳의 책들이 지닌 시간의 향기는 그렇게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곳은 그런 곳이다.


난 이곳이 좋다. 난 책장에 가지런하게 꽂힌 책들 하나하나의 제목을 읽는 것이 좋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책은 꺼내어서 읽기도 했다. 책장에서 마음대로 책을 꺼내서 볼 수 있고, 때로는 몇 시간씩이나 서서 혹은 바닥에 앉아서 읽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의 대형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이곳에는 있다. 편안함. 그건 아마도 편안함이다. 단순히 책이, 책방이 낡고, 오래되서가 아니다. 책은 낡았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방은 책과 책이 살아온 시간을 담고 있다. 책과 책의 시간이 함께 선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기 하기 때문일 것이다.


john-bogna-bxefE0T4c0c-unsplash.jpg - 사진출처 : https://unsplash.com/ko/@johnbogna


난 오늘도 여느 때처럼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익숙한 위치에 익숙한 제목의 책들이 인사를 했고, 전혀 새로운 제목의 책과 첫인사도 나누었다. 책장을 살펴보던 중, 문득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는 상당히 촌스럽고 투박했지만, 제목만큼은 멋지게 쓰려고 한 흔적이 역력한 그런 책이었다. 안타깝게도 제목의 일부가 무언가를 붙여놓았던 듯 훼손되어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난 그 책을 알고 있다.


"기사와 요정의 연대기.."


표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책을 꺼내어 앞표지를 보았다. 다행히 앞표지의 제목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와 요정의 연대기' 뉴폼페이 대학 문학출판부]


이 책을 기억해 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만드는데 한몫을 했었으니까.


'뉴폼페이 대학 문학출판부'. 명색은 유명 대학의 문학출판부였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문학동아리에 불과했다.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자작시나 단편 소설을 모아 고작 대여섯 장짜리 회지를 만들었다. 출판부원들이 처절한(!) 푼돈을 모아서 산 낡은 인쇄기. 학생회관 끝에 있는 네댓 평 남짓한 작은 창고를 개조한 사무실. 그리고 끝까지 남은 출판부원들의 열정 가득한 청춘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책을 만들자!"라고 한 것은 출판부장이던 '제이'였다. 지금은 잘 나가는 출판사의 눈썰미 좋은 편집장이지만, 그때는 루이스턴과 데이브의 고전에 목숨을 건 초짜, 열혈문학도였다. 당시에 우리는 간신히 싸구려 등사원지에 타이핑을 해서 회지를 만들었던 때였다. 그나마도 하나밖에 없는 낡은 인쇄기가 속을 썩일 때면, 팔이 빠져라 손으로 드럼을 돌려야 했다. 팔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잉크의 그 역겨운 냄새가 더 고통스러웠다. 그때의 잉크냄새가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코가 찡그려진다.


그래도 이렇게 고생하는 날은 종종 아주 달콤한 날이 되기도 했다. 한 학년 아래의 세라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오곤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건네는 레모네이드에만 늘 크고 둥근 얼음 두 개가 들어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달고, 어떤 때는 레몬향이 너무 진할 때도 있었지만 나에겐 세상 최고로 맛있는 생명수였다. 신들이 마신다는 '소마(神酒)'가 그에 비할 수 있을까?


세라. 사실 나를 문학출판부로 이끈 건 문학보다는 세라였다. 평소 소설을 읽는 걸 좋아했고, 가끔 글도 끄적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취미였다. 새로 룸메이트가 된 제이에게 나의 취미를 들켰고, 제이는 나를 억지로 문학출판부로 끌고 갔다. 그때는 그저 잠시 자리만 지켜주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신입생인 세라를 만났고 나는 곧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렸구나 하는 생각뿐이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나는 모든 것이 서투르다.


그때 이 책을 만드는데 가장 열성을 보인 것은 역시 제이였다. 다른 부원들은 그런 제이의 열정에 휩쓸렸을 뿐이다. 나는 세라와 책을 만드는 핑계로 데이트를 즐기는데 치중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책장을 넘겨보았다. 군데군데 얼핏 얼핏 무언가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세라를 떠올려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책에 실은 이야기가 모두 우리의 창작은 아니었다. 오래된 요정과 기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번역하고, 다른 몇 가지의 '로망스(Romance : 기사도 이야기)'를 덧붙였다. 여기에 우리가 쓴 시나 소설 중 비슷한 분위기를 끼워 맞춰 만들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한참 동안 추억에 빠져들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책을 덮고 계산대로 향했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면 제이 녀석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늘 그가 담당하는 초보 작가들에게 쏟아내는 입버릇을 듣게 될지도.


[이 따위 책은 당장 오븐에 처넣어버려! 오리통구이처럼 빠짝 구워버리란 말이야~!]


나도 처음 책을 낼 때, 제이에게 숱하게 들은 말이다. 지금 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편집장 제이. 별 볼 일 없는 작가의 글도 그의 가위질만 들어가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편집장 제이슨 커틀랜드가 이렇게 유치하고 어색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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