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아이가 말이 빠르다는 소리를 한창 듣던 때였으니까 네가 돌을 막 지났을 때였나 봐. '엄마', '아빠'는 기본이고 정확한 발음으로 '먹어', '아니야', '주세요'처럼 한 단어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내던 시기라 "얘 아기인 척하고 있는 직장 상사 같다"라고 우스갯소리도 했었지. 목소리는 어떨지 참 궁금했는데, 웃는 소리, 우는 소리와는 또 달랐던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로웠는지 몰라.
어느 주말 오후였어. 너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아빠랑 오랜만에 넷플릭스로 정주행 하던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었지. 거실로 들어오는 그날 오후의 햇살이 좋아서였는지, 드라마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너와 바깥 활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평일엔 어차피 잘 나가지 못하니까 주말 중에서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빼고,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날도 빼고, 미세먼지 심한 날까지 빼면 정말 며칠 남지 않을 것만 같더라고. 그래서 그날은 네가 깨면 꼭 산책을 나가기로 했어.
잘 자고 일어난 너는 '내가 깼다'고 엄마 아빠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아주 짧게 울었어. 나는 기분이 좋아진 너를 안았고, 아빠는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갔어. 이 세상 어느 곳이든 내 두 발로 정복하겠다는 듯 내려놓으라고 어찌나 발버둥을 치던지. 차가 다니지 않는 산책로에 들어서서 너를 내려놓자마자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네 뒷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아빠랑 큰 소리로 웃어 버렸어. 씩씩하게 걷다가도 엄마 아빠가 잘 따라오나 한 번씩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는데 뭉클하기까지 했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를 믿고 사랑해줄까 싶어서 말이야.
꽤 멀리까지 걸어간 네가 힘들 것 같아 유모차에 태우려고 안았는데 역시나 조금 힘들었는지 이번에는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 안겨있는 거야. 그렇게 너를 안고 조금 뒤에서 유모차를 밀며 따라오던 아빠를 서서 기다렸어. 아주 잠깐이었는데, 나는 네가 오늘 아주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던 것 같아. 금세 아빠가 우리 옆으로 왔고, 아빠가 자기에게 오라고 너에게 손을 내미는데, 그 순간 네가 말했어.
바람 시원해.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단어를 안다는 것도,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도, 심지어 '바람이 시원하다'고 두 단어를 이어 상황에 맞게 말을 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더라고. 너의 '바람 시원해'는 나에게 '태풍 몰아쳐', '쓰나미 밀려와'와 같은 정도의 사건이었나 봐. 너의 말을 들으니 그때부터 정말 바람이 느껴지는 거야. 부는 바람이 고마울지경이었어. 너무나 사소해서 알아채지도 못하고 지나던 현상이었는데, 너의 한마디로 온 세상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더라고.
바람이 불고 있었구나.
그래서 네가 시원했구나.
내가 너의 말을 놓치고 싶지 않고, 너무나 소중해서 간직하고픈 마음에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된 말이 바로 '바람 시원해'야.
너의 말이면서 동시에 돌아올 수 없는 우리가 함께 살아낸 한 시절이겠지.
그런데 오늘 바람은 너무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