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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Oct 15. 2024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5




매달 적으면 24명, 많으면 40명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햇수로 9년째 운영하는 베이킹클래스에서다. 과자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바로 나다. 얼굴도 모르고 이야기 한번 나누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서, 가끔은 바다 건너 해외에서 나와 과자 만들기를 하러 온다. 참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세시간씩 시간을 보내는건 물론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꽤 좋아한다. 처음 만났을 때 긴장감 가득했던 공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풀어지는 표정과, 목소리와 섞일 때 따듯하게 전해오는 성취감이 특히 좋다. 계속해서 나를 찾아주는 분들만 있다면 평생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아마 거기에는 나를 괴롭게 만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클 것이다. 매번 난처한 상황이 있었다면 이미 애저녁에 그만두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인복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 복.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나쁜 기억이 많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선옥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엄마인 선옥은 꿈을 잘 꾸는 사람이다. 아마 선옥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일 것이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나의 고조할머니는 무당이라고 했다. 선옥은 중요한 날이면 꼭 꿈을 꾸었고, 중요하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꿈을 꾸면 중요한 날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선옥은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예상치 못했던 날에 대학합격 소식을 받았을 때도, 어리기만 하던 동생이 갑자기 임신과 동시에 결혼을 알렸을 때도 그녀는 썩 놀라지 않았다.


꿈을 잘 꾸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선옥은 두 자녀의 태몽도 모두 본인이 꾸었다. 돼지 왕이 나오는 태몽을 가진 동생은 돈을 아주 잘 번다. 가끔 그게 부러웠던 나는(사실 꽤 자주 부럽다.) 선옥에게 나도 돈을 많이 버는 태몽을 꾸어주지 그랬냐고 툴툴댄다. 그러면 선옥은 늘 어제꾼 꿈인 듯 생생하게 나의 태몽을 이야기해 준다.

“엄마가 요리를 하다 고추가 부족해서 텃밭에 갔더니 글쎄. 햇빛이 쨍-쨍하고, 구름이 하-나도 없는 하늘이었어.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빨-간색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반대쪽에는 파-란색 풋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거야. 엄마가 풋고추를 몇 개 따 가지고 보니까 벌레 먹은 데가 하-나도 없이 반짝반짝 반짝반짝, 얼마나 예쁜 고추였는 줄 아니? 그게 인복이 많다는 거야. 네 주변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꿈이라고.”

그 뒤에는 꼭 빨간색 고추를 땄으면 아들인 건데 풋고추를 따서 너를 낳은 거라고 덧붙이는 것도 재미있다. 사실은 이 얘기가 다시 듣고 싶어서 투덜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들으면 늘 돈을 많이 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선옥이 인복이 많은 태몽을 꾸어준 덕분에 나는 매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과자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왜 과자를 배우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이야기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사람들이 나의 반짝거리는 고추들인가보다 하면서. 이따금 벅차올라 이런 이야기를 선옥에게 전하면 그녀는 여전히 놀라지 않는다. 나에게 오는 사람들을 이미 다 보았다는 것처럼. 이미 결과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잔잔하다. 정말로 지금의 내 삶이 태몽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꿈을 잘 꾸는 사람의 말이니 그저 믿기로 한다. 나 또한 선옥처럼 잔잔한 마음으로 내게 오는 반짝거리는 사람들을 오롯이 사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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