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겨울과봄사이가 있는 성북동에는 낡은 동네인 만큼 오래된 맛집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북동 3대 돈까스가 아닐까. 서울 왕돈까스, 금왕 돈까스, 오박사네 왕돈까스 이렇게 세 곳을 말하는 것인데 모두 옛날 경양식 돈까스를 판매한다. 돈까스가 뭐라고, 주말이면 차들이 줄지어서 들어가는 지경이어서 주차를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이 세-네 분씩이나 계신다. 성북동 주민으로서 세 곳의 음식을 모두 맛보아봤지만 어디도 끝내주게 맛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감상인데 가끔 뜬금없이 생각이 나 자연스레 발걸음을 하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 유명의 비법일지도.
과자점을 운영하다 보면 식사는 대부분 사 먹게 되는데, 얼마 전에도 점심 메뉴를 고르다 또 문득 돈까스 생각이 나서 홀린 듯이 먹으러 갔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메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넓은 접시에 수프가 담겨 나왔다. 곧이어 큼직하고 얇은 돈까스 위로 진한 소스가 뿌려진 접시가 나오고 이어서 반찬들이 놓아진다.
테이블에 올려지는 반찬은 고추와 미역국, 깍두기 이렇게 세 가지가 전부다. 단출해 보이지만 이 식당에서 한 번이라도 식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돈까스를 먹다가 소스가 자극적이다 싶으면 고추를 먹고, 퍽퍽하다 싶으면 미역국을 먹고, 느끼하다 싶으면 깍두기를 먹는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벌써 몇 번이나 방문한 곳이지만 다른 반찬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신기하게도 오래된 맛집은 메뉴도 다양하지 않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적다. 뭐랄까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 처음부터 정답처럼 알맞은 구성으로만 꾸린 게 아니었을 텐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노하우가 쌓였으면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대단하다.
별거 아닌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적당함의 정도를 아는 것이 나에게는 늘 어렵기 때문이다. 과자점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과자의 단 맛의 적당함, 케이크 장식의 적당함, 과자 가격의 적당함 등등 적당함이 필요한 곳이 수도 없이 많다. 특히 오늘 구울 과자의 종류와 개수의 적당함이 어렵다.
매장을 운영하다 보면 가끔 왜지? 싶을 정도로 한 가지 제품이 후루룩하고 팔려나가는 날이 있다. 그러면 과자가게 주인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더 구울까? 말까? 제품을 더 구웠다가 남기라도 하면 더 이상 팔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거나 냉동실에 한동안 넣어져 있다가 가족들에게 보내지거나 한다. 이럴 땐 보통은 다시 굽는데 그러면 꼭 신기한 일이 생긴다. 재빨리 준비해서 한가득 구워놓으면 절대로 안 팔리는 일. 가끔은 반대로 괜히 남을까 봐 만들지 않기도 하는데 그러면 오시는 손님들마다 그 제품을 찾는 일이 생긴다. 으악. 9년째 과자점을 운영하는데도 아직도 적당함을 아는 것은 매번 너무 어렵다.
생각해 보면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경험이 쌓일 시간. 반성과 후회를 할 시간. 마음을 다잡고 머리를 굴려서 다시 도전해 보는 시간.
적당함의 정답을 찾은듯한 수프와 돈까스와 반찬들을 번갈아가며 씹으면서 결의를 다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돈까스집 간판의 40년 전통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9년 전통의 겨울과봄사이는 아직 멀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