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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Oct 21. 2024

먹이고 싶은 마음

#7




낮의 뜨거운 열기는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여름의 오후였다. 손님들이 파도처럼 막 몰아쳐오는 오전 시간을 보낸 뒤의 오후는 거짓말처럼 잔잔하다. 하지만 내일은 다시 내일의 해가 뜨기 때문에 과자를 만드는 사람은 여느 날처럼 다음날 매장에서 판매할 과자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은 과자점이기 때문에 보통 한 가지 맛 케이크를 여러 개씩 굽진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넉넉하게 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홀케이크 예약주문이 있었고, 마침 샤인머스캣의 가격이 좋아서 충분히 사두었고, 나의 체력도 어쩐 일로 조금은 넉넉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매장에서 조각으로 판매할 샤인머스캣 케이크를 하나 더 만들었다.


사람들은 알까 모르겠지만 케이크는 만든 당일에 먹는 것보다 단연코 다음날 먹어야 더 맛있다. 오븐 속에서 뜨겁게 구워지느라 수분을 빼앗긴 케이크 시트를 촉촉하게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트 사이사이에 달큰한 시럽을 바르고 향긋한 리큐르를 넣어 휘핑한 생크림과 계절과일을 켜켜이 넣어 완성하면 그제서야 맛과 향을 머금은 수분이 케이크 시트로 조금씩 옮겨간다. 그러면 따로 놀던 크림과 시트가 다음날이 되면 한마음 한 뜻으로 입 속에서 섞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알고 있는 나는 쇼케이스 안에 아직 미완인 케이크를 넣어둔다. 시간이 케이크를 완성시켜 주길 기다리면서.




보통 다음날 판매할 과자들의 밑준비를 마친 시간즈음이 되면 대충 매장 영업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 한 남자 손님이 오셨다. 사실 조그마한 과자점에서는 준비되는 메뉴들이 그날그날 사장 마음대로 바뀐다. 어느 날은 재료가 부족해서, 어느 날은 체력이 소진되어서,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아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겨울과 봄사이에 오시는 손님들은 가게 SNS 계정을 잘 보고 계시다가 원하는 메뉴가 나왔다 하면 부러 찾아주시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이기적인 영업방침일 수 있는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심에 감사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사진을 들이밀며 “이것 있나요?” 하실 줄이야. 손에 들린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보니 마침 방금 만들어두었던 미완의 샤인머스캣 케이크였다. 이걸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선뜻 드리겠다고는 하지 못하고 “내일 판매하려고 만든 게 있긴 한데…” 하면서 말을 흐렸다. 과자점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아직 숙성되지 않은, 100점짜리가 아닌 한 80점쯤 되는 케이크를 냉큼 판매하기에도 그렇고 또 있는 걸 딱 잘라 없다고 거절하기에도 미안한 오묘한 마음이었다.


남자 손님은 '있긴 한데...'라는 말을 낚아채듯 와이프가 먹고 싶어 한다, 저번에 사갔던 레밍턴케이크도 무척이나 좋아했다며 망설이는 나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오늘 먹지 않고 꼭 내일 먹겠다고 약속까지 받아낸 뒤에야 숙성 중이던 케이크를 잘라 포장을 해드렸다. 아내에게 칭찬받겠다며 즐겁게 돌아서는 뒷모습에 나도 슬며시 기분이 좋아졌다. 과자를 사는 이유는 본인이 즐거이 먹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이처럼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때도 있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과자 만들기를 시작했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 너무나 잘 안다.


선물용으로 과자를 구매하신다고 하면 괜히 그 책임감이 더 막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과자가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로 바뀌는 느낌이랄까. 좋아하는 사람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은 가장 본질적인 사랑에 가까운 마음인 것 같다. 만나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부터 확인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면 과자 만드는 사람은 그저 과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된다.




가게 일을 마무리한 뒤 SNS에 내일의 메뉴를 업로드하는 와중 알람이 울렸다. 잠시 당황했지만 킬킬거리며 웃고 말았다. 방금 전 판매했던, 내일 먹기로 약속했던 그 샤인머스캣 케이크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약속은 아무래도 지켜지지 못한 것 같지만, 사진에 하트 스티커가 가득 붙어있는 걸 보니 약간 부족했을 맛 정도는 이미 사랑으로 채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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