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버지도 찬란한 청춘이 있었다.
아버지의 청춘과 되찾고 싶은 환한 웃음
by 언 초원에서 피어난 꽃 Oct 29. 2022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인생에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이전까지의 자신으로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고 아이의 엄마 혹은 아빠로 살아가게 된다. 아이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도, 이름도 지워진 채 누구 엄마 혹은 누구 아빠라는 자식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이 살아가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로 살아가는 부모만 안 채 살아가며 자라난다. 부모가 되기 이전의 한 사람으로의 모습들을 모른 채로 마치 처음부터 부모였던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보통은 특별한 계기나 노력이 없는 한, 자신 역시 부모가 돼보기 전까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부모도 우리처럼 자유로웠고 젊은 시절이 있던 한 사람이었다. 어느새 그 세월보단 부모로 살아오신 세월이 훨씬 많아져 버렸겠지만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처럼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누구의 아빠가 아닌 이름을 갖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여태껏 해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부모인 아버지의 모습을 이야기를 해왔다. 그 역시 아버지란 사람의 모습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는 부모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의 아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것이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며 아버지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의 끝으로서 해온 이 이야기들도 이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부모가 되기 이전의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편적이지만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은 있었다. 그 내용들을 우선적으로 이야기해 보면서 이 전의 아버지의 모습부터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모습까지 다시 한번 곰곰이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아버지가 어렸던 시절은 그 시절이라고 불리는 60ㅡ70년대였고 시대적인 가난과 고생의 영향을 전 국민이 받던 시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다 같이 힘들었기 때문에 함께 뭉쳐서 으쌰 으쌰 하며 일어날 수 있었기에 힘들면서도 괜찮을 수 있는 시기이었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힘듦에 대해선 견딜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통적인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힘드셨을 것은 고작 16살의 나이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사회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일을 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던 것만이 아니라 그때부터 아예 집을 나와 사셔야 했다.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채 성년이 되지도 않았던 때에 온갖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회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거기다 일을 하는 동안만도 힘든데 집에서 나와 사느라 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매 순간 겪어야만 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삶의 경험마저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활용하시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이 살아오신 삶에서 알게 된 것들이나 방법 따위를 한 번씩 알려주시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겪어온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줄 수 있어도 다른 부분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미안하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그 고생이 과거의 일로 끝나거나 줄어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형태만 바뀐 채 비슷한 강도 이상으로 계속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겠다. 여전히 일꾼처럼 살아야 했던 시간으로 인해 아버지의 경험이나 삶의 형태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한계적인 부분이나 좋지 않은 면도 명확했으며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할 수가 없으니 아버지는 답답한 한편으로 자신의 삶에 아쉬움이 많으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사실 힘든 삶의 지속이 문제가 되는 건, 단순히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불행이 사람을 꼬이게 만든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여전히 심한 돈걱정도 결국 그 시간만큼 가해진 나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걸 뜻했다. 나는 아버지가 거기에 매여 살아야만 하는 것이 싫다. 삶에서 중요했고 또 무거웠기 때문에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으로 차지해 버린 그 걱정이.
그 때문에 아버지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행색이 초라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란 마지못해 선택하는 몇 가지의 작은 것들 뿐이었다.
겨우 뽑기, tv, 인터넷 영상을 보는 것 정도를 소소한 기쁨으로 삼아 채워간 아버지, 그것은 사실 행복이라곤 할 수 없는 체념적 만족이었음이 보이고 느껴졌다. 그것이 슬펐다.
사람은 밥을 먹을 때 한 번씩 고기반찬도 먹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살아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체념적 만족은 오랜 시간 동안 밥에 간장만 비벼먹으며 산 것과 마찬가진 것이다. 배는 채울 수 있겠지만 부실하며 기쁨 역시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등 뒤에서 아버지가 별로 오래 살고 싶지 않단 말을 하셨던 건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열심히 살아온 것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적고 고통은 크고 많아서, 아버지는 인생이 참 재미없고 보람 없다 느끼신 건 아니었을까.
이 정도가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아버지가 되기 이전의 아버지의 모습이자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한 현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어딘가 잘려나간 듯 불완전한 앎이다. 삶이 쉽지 않으셨겠지만 다른 아버지의 긍정적이고 밝은 면을 함께 생각해 보면 분명 아버지도 행복하고 즐거울 때가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원체 집에서는 과묵하시고 tv나 영상을 쉴 새 없이 보시는 아버지이지만 한 번씩은 모든 것을 꺼버린 채 조용히 뭔가를 하실 때가 있다. 그때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잠기는 것 같이 무언갈 가만히 바라보시곤 한다.
분명 인기척이 있는데도 tv나 영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할 때면 나는 한 번씩 방문을 연다. 그때 아버지는 거실의 꺼진 tv 앞에 앉아 계실 때가 있다. 우리 집 tv 아래쪽에는 서랍장이 있고 항상 같은 자리에 주머니가 하나 있다. 그걸 꺼내서 보시는 것이다. 그 안에는 추억과 과거가 담긴 사진이 있다.
사진이 한가득 들어 있는 이 사진 뭉치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버지와 엄마에 이르는 과거의 사진들이 잔뜩 들어 있다. 더불어 어릴 적 내 사진들도 함께 들어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이걸 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기분이 들었을까. 추억에 젖었을까? 과거가 그리웠을까?
그렇게 더듬어본 기억 속에 아버지가 사진을 보시는 모습이 떠오르자, 불완전한 앎의 빈 부분을 이 사진으로 채워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습관 따위가 아니라면 현재에서 그냥 과거를 볼 수는 없으며 추론하기도 쉽지 않다. 과거는 기억이나 마음속 그리고 기록에만 남아 있는 법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과거라면 우리의 안에 있어 꺼내서 보면 되겠지만, 알지 못하는 과거는 기록이 아니면 거의 알 방법이 없다. 사진은 그런 기록 중 하나인 것이고 때로는 알 수 없거나 볼 수 없는 과거를 글보다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그러니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기억에 없는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 위해선 사진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 전의 아버지라는 사람의 모습도 그 사진에 담겨 있으니까.
사진을 한 번 구경해 봐야겠다는 결심 이 전에,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기도 하다.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사람들을 돕고 나누며 작은 것에도 애정을 쏟으며 살아가는 아버지이지만 집에서는 한 번씩 짙은 그림자를 볼 때가 있다. 그 짙은 그림자를 보았던 어느 날엔,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길 바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살아오면서 아버지는 언제가 그래도 제일 좋았냐고. 그 앞에 고된 삶 속에서 라는 말은 언급하기엔 실례가 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 그런 때가 없었다면 어떡하나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존재했다.
아빠는 20대 때가 제일 좋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버지도 가장 행복했던 때는 20대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이유는 자신만 생각해도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랬다. 그 말은 반대로, 자신만 생각할 수 없는 지금이 걱정도 많고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20대가 지난 후의 삶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가장으로 살아와야만 했으므로 그때와 대비되니 말이다. 그래서 분명,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짓누르는 걱정 따위도 반대로 아버지가 행복하던 시절에는 없거나 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젊었을 적 모습이자 그래도 행복했던 20대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씩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서랍장을 열어 사진 뭉치를 꺼냈다. 이제 알지 못했던 아버지란 사람 자체의 남은 모습까지 모두 볼 수 있게 될 시간이었다.
사진 뭉치 안에는 엄마와 엄마 가족사진도 많이 있었고 내가 어릴 때 가족끼리 놀러 가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20대 시절이니 그런 사진들은 따로 빼고 보도록 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조금 더 젊고 독사진 위주의 아버지 사진들이 나왔다. 아버지의 20대 혹은 결혼 전의 사진들임이 분명했다. 어딘가에 놀러 가서 찍은 듯한 모습들 속엔 얼굴에 주름도 없고 신체도 탄탄한 젊은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겐 추억의 한 부분일 그런 사진들이었다.
지금 즐겨 입으시는 편한 복장과 다르게 잘 차려입은 모습도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을 정도로 정장이나 재킷을 걸쳐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멋있었다. 보통 독사진에는 찡그리지도 않고 활짝 웃지도 않는 무표정이 많았다. 아버지는 눈이 큰 편이었고 인상이 굳어 있진 않아서 어두운 무표정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특별한 표정이 없는 기본 표정 같은 모습이었다.
또 다른 사진들도 보았는데, 사실 세월에 비해 아버지의 사진이 다양하게 많지는 않았다. 대신 특정한 때에 반복해서 여러 장씩 찍은 사진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진으로는 독사진 말고는 결혼식 당시와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결혼해서였을까, 아니면 신혼여행에서의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제주도로 간 신혼여행에서만큼은 독사진과 달리 웃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엄청 떠들썩하고 들떠서 큰 목소리로 실컷 웃으시지만 집에 오시면 한없이 과묵해지는 모습의 차이가 사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넘기다가 나는 마치 큰 충격을 받듯 놀라며 한 사진에서 멈춰 섰다. 아버지가 정말 크고 환하게 웃고 계셨던 것이다. 그 환한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온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나는 저런 모습을 살면서 아주 어릴 때 말고 본 적이 있던가. 아니 그때보다도 더 밝은 모습이 아닐까? 사진을 다 본 뒤에 정리해서 서랍장 안에 다시 넣은 후에도 그 여운은 꽤나 오래갔다.
그 모습을 기억한 채로 시간이 지나 거실에서 홀로 tv를 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사진에서 본모습과 지금의 아버지의 모습을 겹쳐서 보자, 단지 연세가 드시고 주름이 많이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문득 아버지의 입꼬리가 내려간 채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꼭 근심의 무게로 내려앉은 것만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도 사진 속에서처럼 그토록 천진하게 웃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거의 흔적도 남지 않게 지워내고 새겨진 내려간 입꼬리와 그늘진 표정을 만든 세월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청춘의 빛을 앗아가 버린 그 힘들고 오랜 세월 속에는 나도 존재하며 삶의 무게로 일조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더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다 느꼈던 일도 다시금 떠올랐다. 청소년 시절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말 안 듣는 내게 강한 목소리를 잘 내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샌가 나의 강한 목소리에 묻혀 별다른 말 없이 조용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원래 알고 있고 예상했던 모습이 아니라 낯섦을 크게 느꼈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어느새 많이 약해지셨음을 느껴 나도 그 이상 말을 할 수 없던 때의 일이었다.
강했던 것이 약해져 슬퍼지는 것은 그것이 이제 허물어져 끝을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여전할 수 없으며 생각보다 이별이 더 빨리 찾아 올 수도 있음을 실감토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사진을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환했던 청춘의 웃음과 그 빛을 사진처럼 바래지게 만든 힘든 삶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했다. 사진은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겉모습과 과거의 한 순간만 보여줄 뿐이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에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는 다른 이야기를 따로 더 들어야겠다 생각하며 아버지가 오시는 주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미루다가 아버지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혹은 잘못돼서 영영 듣지 못하게 되기 전에 말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평일이었다. 야근을 이어오다가 힘이 들어 6시에 퇴근한 날이었는데 하필 그날 버스를 놓쳐 조금 늦게 집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그게 좋은 소식의 징조였던 것일까?
평소처럼 씻으려 욕실로 들어가는데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주말에나 겨우 얼굴을 보는 아버지가 웬일로 집에 오시는 중이랬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같이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와 쉬다가 문득 아버지가 오셨으니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 미리 봤던 사진 속에서 알 수 없던 것들과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예상보다 더 빨리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방에서 거실로 나갔고 서랍장을 열고 물끄러미 소파에 누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아버지한테 이미 꺼내 보았던 사진을 처음 보는 척 설명을 해달라는 말로 사진을 다시 건네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게 뭐가.라고 대답하며 안 해줄 것처럼 굴으셨지만, 막상 내가 사진 뭉치를 가져가 내미니까 누워 있던 몸까지 일으켜 사진을 봐주셨다.
사진 뭉치 아래에는 흑백사진이 있었는데, 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대의 사진이라 아버지도 잘 모른다고 하셨다. 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있는 사진들만 이건 할아버지고 이건 할머니라고 가리켜 이야길 해주실 뿐이었다. 드물게 큰아버지의 젊을 적 모습이 있는 흑백사진도 있었다. 그러다가 무려 전쟁 직후인 53년도의 사진도 보게 되어서 신기했다. 꼭 역사적 기록을 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엔 중학생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찍힌 사진이었는데 아버지가 그중 한 소년을 가리켜 이게 나인 것 같다고 하였다. 혼자 봤으면 몰랐을 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햇빛 때문인지 눈을 찌푸리고 찍은 사진이 어쩜 어릴 때의 나와 똑같은지 내가 아버지 딸이긴 한 게 그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던 것도 재밌었다. 교회에서 단체로 놀러 가신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16살 적부터 일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버지도 교복을 입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래도 교복은 입고 계셔서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학업을 마치진 못했지만 중학교를 경험하시긴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엔 뭉치 안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꺼냈다. 거기에서 아버지 사진만 골라서 물었다. 독사진 중에서 아버지가 계급 높은 군인모자 같은 걸 쓰고 탄탄해 보이는 몸이 드러나는 사진부터 물어보았다. 사진을 보고서도 왜 그런 모자를 썼는지 같은 것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떤 장소에 갔고 누구랑 가서 놀았는지 정도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같은 차림새의 같이 찍은 사진들이 많았고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많았다. 배경은 제주도로 같았지만 시기는 두 가지로 서로 달랐다. 아버지가 제주살이를 하실 때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제주살이를 하셨던 때는 24살 정도였다고 했다. 이 때는 총각시절이었으며 혼자서 살며 양식일을 하셨다고 했다. 힘들었냐 물으니 일은 힘들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행복했다는 20대 시절이기도 했고 그 말대로 다행히 재미나게 잘 지내셨던 것 같다. 혼자 살면서 밥도 해 먹고 만두도 만들어 먹고 했다고 하셨다. 배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릴레이 달리기도 하는 등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고 하셨던 걸 보면 젊은 시절 운동을 꽤나 잘하셨으며 즐겁게 보내신 게 분명했던 것 같았다.
신혼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의 아버지는 다시 봐도 낯설 만큼 환했다. 하얀 눈밭에서 어쩜 저리 크게 웃을 수 있는지, 그게 오래전 사진에도 어쩜 이리 생생하게 담겨 있는지 다시 봐도 참 신기했다. 그래서 그건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듣는 시간으로 혼자서는 알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사진에도 젊은 시절을 지나 내가 태어난 때의 모습도 역시 있었다.
이 이후의 삶이 아버지에겐 고난의 시작이었겠다. 매달린 아이를 받치듯, 나의 삶을 받치며 참 열심히도 살아오셔야만 했다. 그러나 그 힘든 삶의 와중에도 아버지는 포기하지도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으셨다. 넘어질 때야 있었지만 다시 일어났을 뿐 한 번도 그 궤도를 이탈하신 적이 없다.
부모가 된 이후 아버지는 그래도 착실히 살아오셨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피아노 위에서 여전히 쌓여가고 있다.
한 해도 빠짐없이 참 빼곡한 이 다이어리들이 그 증거이다. 남아 있는 다이어리들 말고도 버리거나 다른 서랍장에 있는 것까지 하면 훨씬 많다. 가게를 한창 운영하시던 시절부터도 아버지는 가계부를 이 다이어리처럼 꾸준히 써오셨다. 아버지의 착실함이자 성실함 그리고 삶을 반영하는 조각이다.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아버지가 되기 전 아버지란 사람 자체의 모습도 이제는 충분히 보고 안 것 같다. 숨겨진 이야기나 알지 못한 이야기, 일화들이야 무궁무진하며 그 역시 소중한 아버지의 모습이자 추억이겠지만, 지금 집중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본 다큐에서 들은 말이 기억이 난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할 필요도 잘 지내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끝이 있기 때문에, 무상함이라는 덧없음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며 그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잘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덧없기 때문에, 떠나기 때문에 아름답고 지금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당장은 할 수 없대도 실현을 위해선 준비라도 생각만이라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생각해 본다. 이렇게 이야기해본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드리고 싶고 해야만 할지를. 그건 역시 아버지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금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버지의 청춘 시절 그 환한 웃음만이라도 되돌려드리고만 싶다. 그게 내가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도 희생해야만 했던 찬란한 청춘에 대해 해야만 할 보상이리라.
가장 아버지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역시 우선은 노동의 해방이겠다. 그래서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돈걱정을 없애는 것이다. 20대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하는 것은 짊어져야 할 무게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 짊을 없애고 이제는 내가 짊어지도록 하면 된다. 그걸 목표이자 방향으로 삼아야 할 일이었다.
아직 그 짊을 완전히 짊어지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이제는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돈도 어느 정도 벌다 보니, 작은 것이라도 조금씩 돌려드리는 차원에서 아버지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드리려고 하는 중이다.
아버지는 거의 나한테 뭔갈 먼저 사달라 하시진 않고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많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래도 나는 그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필요한 게 없냐고 자주 묻는다. 부담이나 괜히 필요 없다고 거짓말하시지 않도록 일부러 내 물건을 주문하면서 같이 살게 있으면 시키려고 하는 거라라며 묻는다.
그러나 그렇게 사게 되는 물건은 고작 몇 만 원짜리 염색이 되는 샴푸 따위라, 부담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겨우 이것만으로도 괜찮을까 싶어 진다. 아마 아버지가 나를 배려해서 최소로만 받으시려는 것 같다. 또한 여전히 아버지는 일을 하고 계시고 집에서 일을 하고 계실 때만이라도 나도 간간이 시간을 내어 돕기도 하지면 여전히 돌려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
그런 여전한 아버지의 삶으로 인해 내 미안함과 무거움도 줄어들지 못하고 커져 쌓여가기만 한다. 아버지의 청춘 속 환한 웃음까지 보고 나니 더욱이 무겁고 내가 주는 것들은 턱없이 부족한 기분이 든다. 이보다 더 많은 걸 해드려야만 할 텐데, 비록 방향과 목표는 정했지만 현실적으론 아직은 갈 길이 멀게 느껴지고 그때까지 과연 아버지가 기다려주실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나는 아버지의 청춘을 꼭 보상해드리고 싶다고. 아버지는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으실 자격이 있다고. 아버지는 정말 잘 살아오셨으니까. 정말 열심히 사셨으니까.
아니라고 손사래 치시더라도 자랑스러워하셔도 된다고. 자랑스럽다고. 당신의 딸이 곁에서 몇십 년간 커오면서 그걸 고스란히 보았다고.
그러니 눈부신 청춘처럼 한 때가 아니라 더 오래 빛날 수 있도록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겠다고. 물질로 부족하다면 마음만이라도 가득 모아 드리고 싶다고. 마음이라도 충분히 드리고, 받은 사랑과 책임을 되돌려 드리고 싶다는 마음의 하나로 나는 이렇게 아버지에 대해 오래 생각하며 아버지만을 위한 글을 써온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