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골치 아픈 숙제 중에 하나가 글짓기였다. 주제를 정해주고 글을 써 오라고 하면, 책상에 앉기는 한다.
'나는....."
시작은 했지만, 여기서 좀처럼 나가지 못하고 창문 너머 저 멀리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다 쓰지 못하고 해가 꼴딱 넘어가면 초조한 마음에 다시 끄적인다.
'나는 오늘....'
머리카락이 꽉 가득 찬 배수관처럼 좀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못하고 머리만 쥐어뜯으며 시간만 지나간다.
그러다, 뭔가 실마리가 풀리면 그때부터 신들린 듯이 마구 쓰기도 한다.
'나는 오늘.... 뉴스에서 바다를 봤다. 이번 여름에는 오징어가 풍년이라고 한다. 난 오징어를
참 좋아한다. 오징어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참 맛있다. 그리고, 난 구운 오징어도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해양 글짓기 대회라고 글을 다 써오라고 했는데, 난 오징어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다가 결론은
오징어가 맛있어서 바다가 좋고, 앞으로도 우리나라 수산업이 발전해서 오징어를 실컷 먹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나름의 논리적인(??) 결론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거의 강제적으로 글을 써오라고 해서 다른 녀석들은 대강대강 쓴 모양이었다. 오징어에 대한 내 식성을
마음껏 펼쳐놓은 글은 담임에 의해 우리 반을 대표해서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무려 '장려상'을 받았다.
학창 시절 받은 상이 별로 없기에, 내 장려상은 아직도 소중하게 잘 보관되어 있다.
저자의 주제의식 따위는 아무것도 없이, 뉴스에서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가 나오자 나의
식성만 잔뜩 늘어놓은 글이지만, 그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물결치는 동해안의 오징어를 상상하며
글을 썼었다.
기억력 대회라는 것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대회 참가자들이 기억하는 단어의 숫자가 꽤 많아 놀랐었다.
15분 동안 천 개가 넘는 단어를 기억한 사람이 우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정말 슈퍼히어로 못지않은 비범한 재주를 갖은 사람이 참 많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단어를 무턱대고 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이미지나 그림을 그려 그 이미지
안에서 움직이면서 이미지마다 단어의 의미를 부여해서 기억한다는 것이다. 결국, 천 개가 넘는
단어를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그림처럼 단어를 이미지화시키고 동선을 만들어 그 동선을
지나면서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해서 단어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는 당연히 소설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펼쳐진다. 재미없는 소설을 읽으면
그냥 활자만 들어오고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지루하고 잠도 쏟아진다. 반면, 정말 잘 쓰인
책은 행여 철학책이라고 해도 그 내용이 머릿속으로 영상이나 이미지화되어 재미도 있고, 기억에도
많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의 기억은 대체적으로 이미지화를 기억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쓰는데, 뭔가 제대로 쓰이지도 않고, 주제와 다른
이야기로 빠지기도 하고, 아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난 내 글을 최대한
이미지화시켜서 처음부터 읽어본다. 잘 썼던, 못 썼던 읽으면서 이미지화가 잘 되는 글은 그런대로
수월하게 읽힌다. 내가 썼음에도 정말 잘 쓴 글은 마치 영상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일기 외에는 글을 전혀 써 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시절 장려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내 머릿속에
동해 바다에서 수영하는 오징어를 상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다가 잘 안된다 싶을 때, 글을 많이 써 본 사람들은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내게 글이 막힐 때의 유일한 방법은 내 글을 이미지화시키는 것이다. 나름 효과가 있다.
단, 내 브런치의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방법이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보장하지는 못한다.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글이 되어야 하기에, 그런 점에서는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