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 오는 날 소설 쓰기
제목: 6월 30일
떠날 때가 있어.
떠날 때? 그런 것도 있어?
긴장해서 발버둥 치지도 않아. 그냥 입 근처에서만 빙빙 맴도는 거야
무서워?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여름밤이다.
몸을 날렸다. 아주 가벼웠다.
그것이 희대의 망작이라도, 시각을 뺏어간 색감의, 혼란스러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더더욱 몸이 가벼웠다.
주인공이 되었다. 원래도 1인칭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나의 작가다. 아니야, 나는 나의 신(自神)이 되고 싶었다.
춤을 추듯 물처럼 움직였다. 스텝, 스텝, 스텝. 우산 하나가 내 손에 달렸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집는다.
아름다워. 나는 이게 좋아. 습도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꿉꿉한 여름이지만 내 공간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시원한 동작일 수는 없어. 장황한 오케스트라가 펼쳐진다. 쏟아질 거야, 쏟아질 거야.
이 모든 움직임과 공기 중의 물방울들이. 일렁이는 오로라처럼 쏟아지도록.
그건 마치 수직으로 죽죽 그어버린 정선의 산수화를 한껏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잠시 사색에 잠기다 우산 끝으로 멋진 밤을 가로로 갈라버리니 다시 이 밤으로 돌아와 버렸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역에서는 빗발친다는 말이 미안하게 비가 온 땅을 뚫을 듯 세차게 내렸다.
'누가 이렇게 많이 떨어지래. 신발이 다 젖잖아. 집에 갈 수도 없어.'
검은 우산은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 아까 네가 연주했잖아.'
그제서야 이리저리 손을 올리던 감촉이 남아있는지 이내 수긍해버렸다.
우산 끝을 땅에 여러 번 그은 후에도 여운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깊은 밤이랄 것도 없다. 새벽인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에 취하고, 환각을 일으켰다.
쉽게 사라져 버리는 세상의 것과는 다르다. 어차피 술은 쏟아지고 연기는 아름다운 척을 하며 흩날린다.
결국 짜증 섞인 채 파르르 떠는 손으로 종이조각을 입속에 집어넣을 뿐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아 보이는 것으로부터 여유가 온다지만 명백히 틀린 소리였다.
오직, 그리고 오랜 시간 나에게 집중하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날 오라 하는 나의 손짓을 따라 전력 질주한다.
그는 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단, 웃는 게 너무 소름 끼치게 즐거워 보였다. '어린아이'같다고 한 이유도 그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너무나도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든 나에게 평화를 줄 것 같았다.
'편해지고 싶어.' 이젠 더 이상 죽고 싶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지금도 어리다. 하지만 '죽고 싶다'보다 '편할 것 같다'라는 말에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파고들수록 답에 가까워지는 듯했고, 나는 항상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한번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편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쉽게 그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까. 이젠 아무래도 좋아.
시간이 지체되면, '단'이 나에게 경고를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적당히 반대로 도망쳤다.
'단'은 내 세상 언저리에 살았지만, 겉 세상에만 산다고 치부할 수 없었다.
처음엔 얼굴에만 씌워진 가면처럼 껍데기에 불과했다. 가면을 썼다 벗었다 제멋대로 했다.
그게 나의 힘이었고, 때때로 눈치를 많이 보았지만 썩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샌가 가면이 점점 녹아 붙더니 얼굴 가죽이 찢어지도록 당겨도 맨얼굴을 보이지 못했다.
나는 단이 앞서있는 게 점점 자연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칭찬까지 들어 더 예쁘게 웃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단은 내 얼굴에 융화되어갔다.
단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자려고 누웠을 때 엄청난 양의 수분과 함께 내 얼굴에서 떨어졌다.
단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마르면 행성 바닥에 굴러다닐 것 같은 소금가루만 남았다. 조금은 시원했지만, 그마저도 빈도가 줄어들어가는 게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