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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한인생갱생 Jan 04. 2023

[고시원12] 답답해서 담배대신에 그냥 러닝을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뛰기부터 시작


망갱이는 웬만하면 싫어하는 게 없는 편인데, 어렸을 때부터 웬수져온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달리기.


이상하게도 학교 복도에서 친구를 잡으러 달릴 때나, 피구를 하려고 민첩하게 움직일 때는 빠른 편에 속했는데

각 잡고 준비-땅! 해서 달리는 달리기는 잘해봤자 4등이었다.


어머니들이 팔등에 3등까지만 도장을 꽝 하고 찍어주는데

초등학교 내내 달렸지만 도장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운동회였던 6학년 때, 단체 줄넘기는 반 대표로 1등을 했지만, 달리기가 끝난 후엔 너무 서운했다.


못한다고 연습을 한 적도 없었고, 그마저도 '원래 못하는' 달리기가 미워서 잘 뛰지 않았다.

나도 계주를 뛰는 친구들만큼 '타고난' 빠르기로 달리고 싶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달릴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속이 뻥 뚫리는 경험도 적어지고 시원한 공기를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로 나이만 먹어갔다.


.

.

.




어제는 막막한 인생을 생각하니 또 답답해져서 술과 담배가 너무너무 당겼다.(술은 아주 가끔 마시지만, 담배는 아직이다)


알바를 하면서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들은 조언 중에 '절대 스트레스받을 때 담배를 시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식당 홀이나 주방 쪽에서 일하다 보니 사람과의 마찰과 노동강도, 여러 스트레스에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주방 식구들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 드물었다.


잘 참아왔는데 니코틴에 잠시 기대어서 도파민을 얻어내고 싶었다.

활력을 날로 먹으려는 게 도적질이나 다름없다. 도파민 도적질은 이미 커피로도 충분해서 지치기만 했다.


나는 밤 12시에 너무 답답해서, 내 인생이 너무 막막해서,

5m도 안 되는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오려고 했지만

그 생각조차 너무 피곤해서 실패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커피를 마실 시간인데 자꾸 미뤘다.

5시가 되었다. 고시원 앞 초등학교 운동장은 5시에 개방했다.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런데이 어플을 깔았다. 버즈를 귀에 끼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그냥 나갔다. 옷을 입어버렸으니 그냥 나갔다.


1일 차를 시작했다. 막 달려버릴 생각이었는데 천천히 뛰래서 천천히 뛰었다.

아주 느리게 뛰는데도, 운동장에서 본 동그란 하늘이 전부인데도 가슴은 뚫렸다.

바다에 나를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달리니까 내 세상에 나를 던졌다.


'이 시간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야, 잡생각을 해야지.' 했는데 달리는데만 집중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나는 매일 잡생각에만 갇혀 사는데.


매일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유튜브에서 러너들에게 갈구하는 건 빡세게 달려라! 가 아니라 충분히 쉬어라! 였다.

런데이 어플의 내레이션 트레이너님도 계속 강조했다. 기록을 앞당기는 게 아닌, 부상을 당하지 않고 오래오래 달리는 게 목표라고......


나는 답답해서 담배 대신에 그냥 러닝을 시작했다.

입문 담배 종류랑 피는 방법까지 검색했는데...

도 가오(?) 잡고 멋있게 피고 싶었는데, 약간 억울하지만 내가 피곤한 걸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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