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은 오동나무를 꿈꾼다.
제1장. 오동잎이 내려앉은 자리
미아리 골목 어귀, 철거된 건물 터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보랏빛 꽃잎이 바람에 실려와 수연의 어깨에 앉았다.
그건 분명… 오동나무 꽃이었다.
“이 골목에 오동나무가 있었나?”
수연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들었다.
담벼락 사이, 허물어진 벽돌 틈에서 믿기지 않게도 키 큰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꽃이 만발한 그 나무 아래엔 누군가 서 있었다.
실루엣, 어깨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그 사람은 수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오동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 꿈속의 장면이 겹쳐졌다.
꽃잎이 흩날리는 밤, 오동나무 아래, 그 사람과 마주 서 있던 장면.
목소리는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말하던 그 사람.
그리고 이내 사라졌던 그날 밤.
수연은 두 발을 떼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마치 지금, 현실 속 그 사람이
꿈에서처럼 다시 돌아올까 두려운 듯이.
제2장. 잊힌 이름의 기억
그 사람의 이름은 선우였다.
수연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미아리, 이 오래된 동네가 수많은 시간을 휘감고 변해가는 동안에도
그 이름만큼은 낡지 않고 남아 있었다.
수연과 선우는 어릴 적부터 이 골목을 함께 뛰어다녔다.
재개발의 바람이 불기 전, 작은 기와집과 좁은 골목이 이어지던 시절.
비 오는 날엔 흙탕물 튀기며 놀았고,
오동나무 아래에선 서로의 비밀을 묻었다.
“오동나무 밑에서 소원을 빌면, 봉황이 꿈속에 나타난대.”
어릴 적 선우가 수연에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순수한 거짓말이었을까.
수연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밤, 진짜로 봉황을 꿈에서 본 건 사실이었다.
그 꿈 이후, 선우는 사라졌다.
마치 오동잎처럼 스르르 낙엽 되어 흩어졌다.
어른들은 그저 “서울을 떠났대”라거나 “집안 사정이 있대”라고 했지만
수연은 믿지 않았다.
그날 밤, 봉황과 함께 선우가 떠났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3장. 다시 살아난 골목
그날 이후, 수연은 그 골목을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러다 몇 달 전부터 재개발 지역의 빈터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오동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 나무 아래선 이상한 꿈을 꾼다.”
“누군가 매일 새벽, 꽃잎 사이에 제사를 지내는 걸 봤다.”
무당의 언니가 말하길,
그건 ‘땅의 기억’이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란다.
“오동나무는 혼을 담는 나무야. 쉽게 죽지 않아.”
“그 뿌리가 다시 살아난 건, 미아리가 뭔가를 기억해 내려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 수연 역시 오동나무 꽃잎을 맞았다.
그때부터 매일 밤, 봉황이 꿈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꿈 끝에서 선우의 뒷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제4장. 봉황의 그림자
수연은 그날 새벽, 꿈에서 깨어나며 이상한 향을 맡았다.
가을비가 스며든 흙냄새도, 밤꽃 향기 같은 것도 아닌,
어디선가 피워 올린 백단향 같은 기이한 냄새였다.
그리고 그날,
미아리 한복판, 재개발로 허물어진 빈터에서
오동나무 꽃이 만개했다.
하필 그 자리는
어릴 적 선우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폐가터였다.
수연은 그곳을 찾아갔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그 나무 아래엔 누군가 새하얀 종이를 접어 봉황의 모양으로 세워두었다.
절묘하게도, 그 종이 봉황의 날개 아래에는
선우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누가… 여기에 선우를…”
수연이 종이 봉황을 손에 들려던 순간,
등 뒤에서 부드럽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건드리지 마요. 그건 꿈의 문이니까.”
수연이 돌아보자,
거기엔 흰 소복을 입은 젊은 무당이 서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 실 한 가닥이 비치듯 엮여 있었고,
손목에는 잿빛 구슬이 엮인 팔찌가 달랑였다.
“당신도 봉황을 본 거죠? 꿈에서.”
“선우… 그 사람을 찾고 싶다면, 미아리의 기억을 되살려야 해요.”
제5장. 점(占)의 길
수연은 무당과 함께 미아리 골목을 돌아다녔다.
철거된 담벼락, 사라진 간판들, 허물어진 기와집 자리에
하나둘씩 오동나무가 피어났다.
마치 누군가가 숨겨놓은 씨앗이
기억을 되짚으며 하나씩 봉인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미아리엔 아직 점집이 쉰 군데도 넘게 남아 있어요.
근데 진짜 무당은 몇 안 돼요.
우리는 그저 이 동네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무당은 자기를 ‘아라’라고 소개했다.
아라는 매일 새벽, 오동나무 꽃잎을 모아
봉황의 형상을 만든 뒤, 작은북을 울리며 기도를 드렸다.
“선우는 이 땅을 떠난 게 아니라, 이 땅에 잠긴 거예요.
봉황이 지키는 그 틈새에.”
제6장. 기억의 봉인
아라는 수연을 데리고 미아리에서 가장 오래된 점집 골목으로 향했다.
옛날 시장터 뒤편, 지금은 허물어진 담벼락과 부서진 기왓장만 남아 있는 그 자리엔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은 붉은 나무문이 있었다.
바로 ‘봉인소(鳳印所)’.
오래전, 진짜 무당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는 곳이다.
“이 문을 열려면 대가가 필요해요.
기억 하나를 내놔야 해요.
아주 소중한 거.”
수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선우와의 마지막 인사,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던 그 장면이 있었다.
그걸 내놓는다면…
다시는 그날의 온기를 떠올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연은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문이 열렸다.
안쪽은 검붉은 어둠.
그러나 어둠 한가운데,
하늘색 오동나무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의 중심에서
금빛 연기처럼 번지는 무늬 하나가
수연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마치 과거의 한 순간을 복원하듯.
그 순간,
봉황의 울음소리가 미아리 하늘을 가르며 들려왔다.
한때 이 동네를 지키던,
아무도 보지 못했던 존재의 목소리였다.
제7장. 봉황의 기억
수연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이 세계가 아니었다.
하늘빛 안개가 드리운 계곡,
그 위를 날아오르는 눈부신 봉황 한 마리.
그 등에는 선우가 있었다.
“… 기억나지? 여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선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따뜻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봉황의 수호 아래,
오동나무 골의 ‘심(心)’이었던 것이다.
옛날, 미아리는 '오동니무골'이라 불렸다.
왕족의 무덤이 있던 신령한 땅,
봉황이 날아와 머문 곳.
그 중심에 자라던 오동나무는
사람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신성은 잊히고,
나무들은 베어졌고,
봉황은 잠들었다.
그날 밤, 수연이 오동나무 아래서 흘린 눈물이
봉황을 깨웠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지만
끝내 잊히지도 않는 그 마음.
봉황의 등에 선 선우가 말했다.
“수연아, 네가 나를 기억한 순간,
나는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었어.”
그리고 손을 뻗어 수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
오동나무 꽃이 미아리 전역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재개발로 허물어진 골목,
철근과 시멘트 사이,
담장과 담장 사이마다
연보랏빛 꽃송이들이 피어났다.
미아리가 다시 살아났다.
잊힌 기억과 신령한 기운이
한 번 더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최종장. 오동의 약속
꽃이 피면 사랑이 시작된다고 했지.
하지만 이 사랑은,
꽃이 피면서 끝났다.
선우는 말없이 수연의 손을 감쌌다.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났다.
그 빛은 봉황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오동나무 꽃처럼 아득했다.
“수연아,
이젠 널 두고 갈 수 있어.”
“안 돼… 이제 찾았는데.”
수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눈엔 눈물 대신 웃음이 머물렀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오동꽃이 다시 피는 날,
그땐 인간으로,
같은 시간 속에서.”
봉황은 하늘로 날았다.
그 등 위에서 선우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내가 너를 사랑한 모든 시간은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어.”
빛이 사라지고
하늘은 조용해졌다.
그날 이후,
미아리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꽃도 없던 오동나무에서 꽃이 피었다더라.”
“꿈속에 붉은 새가 나왔는데, 이름을 ‘선우’라 부르더라.”
“담벼락에 피어난 꽃에서 음악이 들리더라.”
그리고,
수연은 미아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동나무 한 그루 곁에 작은 찻집을 열고,
계절마다 꽃을 기다렸다.
누군가는 그녀를 ‘기다리는 무당’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봉황의 신부’라 불렀다.
몇 해가 흘러,
수연은 매년 봄마다 같은 꿈을 꾼다.
연보라 오동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어느 골목,
그 끝에 누군가 서 있다.
회색 재킷,
검은 단화를 신은 남자.
그가 웃는다.
“수연아, 나 왔어.”
그리고 수연도 웃는다.
“선우야, 오래 기다렸지.”
그곳은 미아리.
오동니무골.
봉황이 깃들고,
사랑이 머무는 땅.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