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궁동을 참 좋아한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특색 있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행궁동에 요즘 들어 유독 많이 보이는 인테리어가 있다. 벽 전면을 통창 유리로 해놓은 인테리어가 그것인데, 사실 처음 보는 생김새는 아니다. 옷가게와 같이 상품을 파는 공간은 그 상품을 진열하고 전시함으로써 소비자의 이목을 끌어 그들이 가게에 입장하게끔, 그리고 상품을 구입하게끔 유도하고자 유리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전면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카페와 식당이 늘었다는 점이다. 나는 행궁동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렇게 꾸며진 가게들을 보면서 저기서는 먹고 싶지 않다고, 저런 공간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같이 걷는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꼭 해주었다. "그게 왜 싫어?" 묻는 말에 나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 대답했다.
공간에서 투명한 유리창이 하는 역할은 공간 내부를 향한 시선의 쏠림을 유발한다. 그리고 시선은 공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시선에 담기는 것은 인테리어나 전시된 물품 등과 같이 공간 내부의 특성 뿐만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 나아가서는 내부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상호작용 까지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옷가게를 지나다가 마음에 드는 블라우스를 발견해서 가게에 들어가 구매한다든지, 다른 손님에게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점원을 보고 가게에 들어가본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 유리창이 카페나 식당에 있으면 나는 좀 불편한 기분이 들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거나 부득이하게 가게 될 경우 유리창의 사각 지대를 찾았다.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불편함의 근거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첫째, 전면 유리창은 나의 내밀한 모습을 너무 가감 없이 공개한다. 전면 유리창 밖에서는 내가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든 순간-말이 순간이지, 꽤 긴 시간동안 지속된다.-의 습관적인 움직임과 어떤 기색과 표정이 다 보인다. 가령 오래 걸어 발이 붓는 바람에 구두를 벗고 있다거나, 모기에 물린 발목을 살짝 긁는다거나, 식사를 하던 중에 음식물을 질질 흘린다거나 하는 모습도 숨겨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가 자의식 과잉이고 타인의 시선에 너무 민감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예민성을 가진 나로서는 내 모든 모습이 누구에게나 관찰 가능하다는 점이 아찔하고 내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시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피곤하다. 실제로 너무 편하게 수다를 떨던 남자 분이 유리창 너머의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바지 속에 손을 넣어 긁는 모습을 보고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해서 혹시나 하는 조심성을 갖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낯선 사람 앞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불편하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내가 음식을 입에 넣고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저작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민망하다. 이런 점에서 내가 공감한 문장도 있다.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로, 나이리지아에 살던 여주인공이 처음으로 미국 푸드코트에 와서 음식을 먹게 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둥근 테이블 주위에 앉아 기름진 음식이 담긴 종이 접시 위로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이케 숙부였다면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는 생각만으로도 질겁했을 것이다. 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별실이 없으면 결혼식에서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너무 많은 탁자와 너무 많은 음식이 있는 이 열린 공간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공개적인 무언가, 존엄성이 결여된 무언가가 있었다.'
둘째, 전면 유리창은 창을 통해 내 모습을 전시하여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홍보에 이용한다. 나는 카페나 식당을 방문하여 정당한 돈을 지불한다. 내가 지불한 돈의 대가는 맛있는 음식 혹은 향긋한 커피를 적당히 개방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전면 유리창은 일종의 카메라 화면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내부에 있는 나의 모습을 외부에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내부에 사람이 많을수록,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럴싸한 음식/커피를 제공받고 있을수록, 그리고 그것을 말 그대로 행복하고 여유롭게 즐기고 있을수록 외부의 시선을 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부에 들어오게끔 유도한다. 물론 가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도록-이는 '전시되었으면 하는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과 어느 정도 유사한 표현일 것이다.- 그들에게 흡족할 만한 음식/커피를 제공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꾸미고 유지해주시는 공로는 인정한다. 그런데 내가 거부할 새도 없이 나의 개인적인 순간들이 마치 홍보짤로 이용되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할 때가 있다.
내 입장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어떻게든 설명해보려 명문장을 훔쳐오기도 하고 이런 저런 예도 들었는데 전면 유리창 인테리어가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거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가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볼 때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잘못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코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아주 오랜 관계가 아닌 이상 상대의 얼굴 생김 전체를 기억하기 어렵고, 비교적 최근에 만난 사람이라면 상대의 하관을 본 일이 매우 드물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철저히 낯선 사람의 하관을 본 적도 없고, 그에게 내 하관을 보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면 유리창 속 식당 혹은 카페에서 마스크를 잠시 벗고 음식물을 섭취하다보면 창밖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가 간혹 있다. 창밖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 반면, 나는 마스크 없이 하관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그 순간에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관을 노출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발가벗은 듯한 부끄러움이 하나고, 저들이 저렇게 마스크 쓰고 방역에 열심인 순간 나는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작은 죄책감이 둘이다. 방역 수칙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약속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째 최전방에서 고투 중인 의료진 분들이나 일상에서 나보다 더 엄격하게 조심하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타인에게 보여진 내 모습이,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고 너무나 즐겁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지인과 수다를 떠는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다. 그래서 그분들에 비하면 조금은 안온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그대로 전시되는 것이 죄송하고 불편하다.
국어 사전에 따르면 '전시'란 여러 가지 물품을 한곳에 벌여 놓고 보이는 행위라고 한다. 지금 세상에는 각종 매체의 발달로 전시의 도구가 너무 많고 전시의 내용도 정말 많다. 또한 내가 지적한 대로 원치 않는 전시도 많이 있다. 사람이 마치 물품처럼 전시에 너무 빈번하게 이용될 경우, 불특정한 어떤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기가 어렵다. 사람의 자유로운 한 생이 시선으로 인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를, 그 자유로움이 억압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