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말함 May 09. 2022

부러운 게 지는 거라면 저는 대패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이미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애를 낳은 것은 부럽지 않았지만 전혀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동기가 벌써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나도 모르게 "부럽다."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은 "부러우면 지는거야." 그리고 내가 한 말은 "그렇담 나는 대패했어." 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다. 말도 못하는 어린 아기가 음식을 양손에 쥔 채로도 만족하지 못해 입으로 앙 하고 음식을 채갔던 일화는 우리 집의 전설이다. 중학교 3년 동안 키가 20센티나 자랐던 나는 30센티가 자라고 있던 남동생과 음식을 두고 늘 다투듯이 먹어야 했고, 모든 음식에 내 이름을 써붙여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정도였다. 식욕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이므로, 식욕과 식탐이 엄청났다는 말은 다방면에서 욕심이 많았다는 말로 확대해서 해석하더라도 내 경우에는 온당하다.


   나는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내가 맡은 일이라면 기어이 끝을 봐야만 했고, 가지고 싶은 건 가졌으며, 하고 싶은 건 해내야 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욕심에 비례한 성취를 맛보았으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때로는 내게 없는 것을 간절히 바라기도 하고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상대를 보고 질투심에 사로잡힌 적이 많았다. 나는 나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해체하여 내 주변의, 또 미디어 속의 다양한 사람들과 항상 비교, 분석했고, 결국은 나보다 나은 점들을 모두 찾아 내었으며 결국은 나 자신으로 만족하는 일에 실패해버렸다. 예컨대 ㅇㅇ은 나보다 멋진 다리를 가졌고, ㅇㅇ은 나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 사회 생활을 잘하고, ㅇㅇ은 나보다 좋은 직업을 가졌고 등등. 욕심이 너무 많은 나머지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고작 나인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나를 사랑하는 데 실패해버린 나는 곧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질투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순도 100퍼센트의 축하를 해주지 못하는 나의 졸렬한 마음에 실망했으며, 이 마음을 알아차린 이들이 나를 떠나버릴까봐 한동안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질투에 대해 곱씹을수록, 질투는 참으로 분석적이지만 다분히 오류와 비약을 내포한 사고 과정의 결론이라고 여겨졌다. 질투를 유발하는 사고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질투하는 대상이 A라면, 내가 A를 질투하는 이유는 A가 A라서가 아니라 A를 이루는 어떤 요소-이를테면 그의 특성이나 소유물, 때로는 그와 관련된 사건이나 어떤 결과-가 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A의 어떤 요소를 B라 한다면, 나는 B로 인해 A에 주목하게 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은 산뜻한 부러움의 감정이다. 'A의 B가 정말 부럽다!' 그런데 질투하는 자는 여기서부터 디테일한 추론을 감행한다. '내게 없는 B를 A는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가?' A는 타고나면서부터 B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어떤 노력이나 일련의 과정을 거쳐 B를 갖게 된다. B를 갖기 위해 A가 수고한 혹은 지나야만 했던 과정을 C라고 해보자.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실패하므로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C와 A의 C-자신의 추측일 뿐인-를 비교하며 A가 자신에 비해 B를 너무 쉽게 가진 것이 아닌가 착각한다. 곧이어 뭔가 공정하지 않다며 억울함을 느낀 질투하는 자는 A가 얄미워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A가 출생으로부터 B를 가졌다고 판단된다면-사실 이것도 추측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고 이쯤 되면 질투하는 자는 배가 아파 땅을 구른다.


   임현주 아나운서의 책, <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네잎 클로버는 그러니까 그냥 내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노력과 무관하게 찾아온 내 몫의 행운이었던 것이다.  

 네잎 클로버를 손에 들고 오면서 깨달았다. 노력만이 행운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 내가 쿨하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부러움과 질투라는 감정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쏟는 노력에 있어서만큼은 의심이 없었기에 그보다 애쓰지 않고도 좋은 기회를 잡는 듯한 모습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까, 그가 어떤 노력을 얼마만큼 했을지. 나의 노력만을 크게 확대해서 본 것은 아니었을지. 무엇보다 행운은, 행복은, 노력 순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노력이라는 잣대 하나로 누군가 축하 받을 만하다, 아니다를 구분 짓고 있었구나.'"


  삶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욕심이 줄어들었고 비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그만두게 되었다.-아마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누군가 나보다 나은 무엇을 가졌다면 그냥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 일상이 참으로 안온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러우면 지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 누군가가 부러울 때 기꺼이 져주리라, 내 마음을 다해 부러워해주리라 다짐한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가 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