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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Feb 27. 2022

연애의 기술

  사촌 동생의 카톡 상태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시에 임용 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탓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을 것이라 짐작되어 연락을 했다. 공부하는 거 많이 힘드냐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사촌 동생은 남자 친구 때문에 빡친다 했다. 예상치 못한 답안이라 신박했다. 그녀가 연애를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며 수 차례의 대화를 통해 남자 친구를 한번도 본 적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겁나 빡친다니?!  


  사건은 이러했다. 그는 토요일에 친구 2명을 만나기로 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했고, 그러면 우리는 언제 만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거리두기 4단계 때문에 저녁 6시 이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없으니까 저녁에도 그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딱히 없었다. 그녀는 정확한 시간만 정해진다면 그 시간을 피해서 맘껏 공부할 요량이으므로 토요일 저녁에 봐도 괜찮고, 일요일에 봐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영 뻑적지근한 것이, 그는 '토요일에 보자.'가 아닌 '토요일에 볼 수도 있다.'라고 발화함으로써 그녀에게 만남의 약속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만남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에게는 가능성을 불가능으로 바꾼 경험이 수차례 있었으므로-이것은 그가 게을러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기보다는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열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큰 까닭에 지키지 못할, 말의 공수표를 자주 던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조금 더 온당하다.- 그가 본인의 발언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두고보기로 결정했다.  

 

  토요일이 되었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그녀는 저녁이 되자 그에게 연락을 하여 자기는 지금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아직도 친구들과 함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친구들과의 식사 따위를 사진으로 찍어 다정하게 답장하였으되, 9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났고, 친구들과 헤어진 그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금이라도 갈 수 있지만 그녀가 피곤할 것 같다고 핑계를 댔으며 내일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의 불확실한 답변과 무책임한 하루 일과를 문제 삼으며 이런 식으로 연애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빡침을 가속화시킨 페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는 상황이 이렇게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도 알고 있었다. 이미 비슷한 전적이 있었을 뿐더러, 그가 그녀에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결정권을 그녀에게 돌려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토요일 만남에 대한 가능성이 불가능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기회를 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주도면밀하게 판단하기 위한 심산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라고 생각해버렸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으며, 앞으로의 상황이 빤히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 결과, 그녀는 엄청나게 빡치게 되었다.  

 

  연애에 있어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기회를 남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본인의 정신 건강에, 이차적으로는 연애 관계의 유지 혹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할지를 알 것 같은 상황에 미리 개입하여 서로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예컨대 그녀는 그에게 "나는 언제 만나는 지가 정확하게 정해지면, 그 시간을 피해서 공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아. 토요일에 약속이 있다고 하니까 무리 하지는 말고, 정확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딱 정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물어 볼 수 있다. 이어 그는 만남의 가능성이 아닌 만남의 약속을 제안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만남의 약속을 기다리며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 없이 본인의 공부 계획에 맞게 효율적으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건강하고 지속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 부재의 시간이다. 연애의 시간은 함께 하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혹은 그녀가 부재하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함의한다.-심지어 물리적으로 대단히 가깝거나 열정이 넘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재의 시간이 대체로 더 길다.- 부재의 시간은 그 혹은 그녀의 부재일 뿐, 내가 존재하는 시간이다. 자신의 생활을 기꺼이 잘 보낼 수 있는 존재만이 건강하게 재회할 수 있다. 고로 연애는 흩어졌다 모이는 기술이다. 부재의 시간을 판단하기 위한 시간으로, 그래서 열받는 시간으로 낭비하지 말고 오롯이 내가 존재하는 시간으로 향유하는 자들이라야 연애의 당사자 서로가 행복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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