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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Feb 25. 2023

큰 어른, 노스님

보각스님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하기 위해 관순이와 기차를 함께 탔던 그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1919년 이화학교 재학시절 친구인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을 폈던 보각(普覺) 스님이 지난
17일 백수(百壽)를 맞이했다.     


2003년  불교신문에 스님의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통일정사에서 노스님의 백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백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건하셨다. 그 후 우리 집에 모셨는데 항상 정갈한 자세로 하루종일 무언가 쓰셨다. 아이 얼굴처럼 환한 스님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유관순열사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가 노스님을 찾아왔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화학교 시절 ‘형님’ ‘아우’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일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회고하시기도 했다.     


노스님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직접 겪었다. <여명의 눈동자>의 여주인공보다 더 드라마틱했다고 할까. 노스님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제국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만세운동으로 혹독한 고초를 겪었지만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두 아들과 남북으로 떨어져 살게 됐다. 이때의 아픔이 결국 출가로 이어졌다.


스님은 하남시 배알미동(수자원공사 쪽의 검단산 등산로)의 절을 인수해 증개축을 거쳐 암자이름을 ‘통일정사’로 지었다. 가슴에 묻은 두 아들과의 만남을 평생 염원했다. 노스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분이 시어머님이시다. 시어머님은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신 노스님 때문에 어린 시절이 많이 외로웠다 하셨다.


노스님은 출가 전에 국방부인회장, 불교부인회장, 마야부인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고, 종단 정화불사 때는 신도대표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노스님은 1958년 계륜스님을 은사로 동산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이후 통일정사에서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와 수행에 전념해 왔다. 남편과 연애할 때 노스님은 은사이신 동산스님의 성(姓)이 나와 같아서 좋아하셨다.      


노스님은 ‘항상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야 한다.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강조하셨다. 아들내미가 어릴 때 친구 따라 교회에 나가는 걸 보시고 ‘어릴 때부터 종교 활동 열심히 하는 것은 좋다’ 고도하셨다.     


노스님은 2006년 5월 24일 새벽에 입적했다. 세수 103세. 법랍 49세. 어머님이 스님을 부르는 안타까운 목소리에 잠이 깨어 방에 들어가 보니 귀와 코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119에 연락하고 병원으로 옮겼는데 바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부처님 오신 날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어머님은 바쁜 스님들을 배려해서 2일장으로 했다. 다비식은 돈도 많이 들고 번거로우니 화장을 하자고 하셨다. 일반인처럼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꽤 나왔다. 신기했다. 통일정사에 노스님 사리탑을 세웠다.


노스님은 어느 날 절을 찾아온 비구스님을 보시자마자 전생의 내 아들이라며 수양아들처럼 돌보셨다. 그분이 바로 응봉스님이다. 불교를 대중화하려고 여러 방면에 노력하시고 있다.     


노스님은 1904년에 태어나셨다. 속명은 이정수, 법명은 보각스님이다. 1919년 이화학당 시절 당신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이는 두 살 위인 유관순 열사와 5년간 한방을 쓰며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밥공기를 엎어놓고 태극기를 손수 그리셨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방마다 붙여 다음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며칠 후 이화학당 학생들은 서울역에 나가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스님의 친구인 유관순열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     


노스님은 생전이던 2004년 7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50) 수석연구원이 펴낸 ‘유관순’(520쪽·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고증을 맡아 3ㆍ1 운동 당시의 상황과 유 열사의 활동상을 증언했다. 스님의 귀중한 증언으로 유관순열사의 한자이름과 출생ㆍ사망일에 관한 논란이 종지부를 지을 수 있었다.     


지금은 통일정사로 오르는 길이 잘 닦여져 있지만 그 옛날 운송수단은 오직 사람이었다. 어머님은 노스님이 필요한 물품을 매번 등짐을 지고 산에 오르셨다. 통일정사는 동네주민들과 가까운 절이었다. 암자를 중건할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내일처럼 도와주는 등 주민 모두가 아끼는 절이었다. 스님은 기도비를 신도들 형편껏 받으셨다. 마음이 중요하다며 적은 돈도 마다하지 않고 기도를 해주셨다. 스님이 입적하시자 신도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남편은 통일정사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절에서 자랐다. 동자스님처럼 가사도 입고 머리도 밀었다. 새벽기도를 할 때 기도문을 줄줄 외웠다. 어릴 때는 기가 맑다고 한다. 특별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남편은 여느 또래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내가 반했는지 모른다.

며칠 전 노스님이 기일이었다. 코로나로 모임을 자제하는 터라 절에는 못 갔다. 언제나 우리 가족을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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