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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Nov 16. 2022

민주주의

49금 인문학 사전 04.

얼마 전에 동네 식당에서 지인과 소주 한잔하느라 해물파전을 시켰다가 크게 낭패를 봤다.
도저히 해물파전이라고 볼 수 없는 밀가루 부침개가 나와서 엄청 황당했지만, 어쩌겠나?
해장국 전문집에서 해물파전 시킨 내가 멍청한 거지.

그런데 이건 약과다. 북한의 정식 명칭을 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리가 알고 있기로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세습독재 공산국가가 내세운 이름에 '민주주의'란 단어가 떡하니 들어가 있다.
(누군가가 나처럼 이름만 믿고 북한으로 이민 또는 월북하는 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이래서 요즘 중고등 교과서가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려고 하나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민주주의는 다수적 의견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에, 민주주의는 '평등'에 중점을 둔다.

민주주의는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는 정치적 체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홈룸이니 뭐니 하면서 학급 운영에 대한 민주적(!) 회의에 몸소 참여하며 갈고닦았었기에, 또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수차례의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을 통해 이룩한 정치체계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라는 자가 '역사의 종말'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그 성능이 입증되어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이다.
(아시다시피 소련,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는 진즉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중국은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거의 변절했다고 봐야.)
구태여 짧게라도 설명을 하자면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국가의 운영을 국민의 뜻대로 하는 체제.
물론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느냐에 따라 직접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등 그 지향하는 가치나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용되며, 기본적으로는 시장주의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전제로 운영된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가 물려준 여러 가지(올림픽, 마라톤, 드라콘의 법, 드라마 등등)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직접민주주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 병력의 중심인 평민의 발언권이 당연히 세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직접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시점의 머릿수를 보면 귀족과 시민 약 2만, 노예가 6만 정도인 공동체였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시민들이 아고라에 모여서 효율적으로 국가운영을 의논할 수 있는 규모라고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유심히 살펴봐야 할 지점은 참정권이 없지만 국가의 부를 만들어내는 노예 집단의 규모가 6만이란 점이다.
비율로 보면 약 75%의 구성원이 참정권이 없이 노동력만을 제공한 꼴이다.
덕분에 귀족과 시민들은 경제활동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느긋하게 정치에 관심을 가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를 많이 얘기한다.
처질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일반 유권자들과의 5분 토론이다'
또 사회계약론의 루소도 '민주주의란 말을 엄밀한 의미로 해석하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신들로 구성된 인민이 있다면, 그 인민은 민주 정치를 할 것이다'라고 했단다.
다양한 계층 간의 가치관이나 상충하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과 상생의 정치.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낼 자질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본다.



흔히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적 무관심과 낮은 투표율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1948년 우리나라 첫 총선의 투표율은 95.5%였으나 2020년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66.2%였다.
(그나마 18대 총선의 46.6%에 비하면 엄청 뜨거웠다).
먹고사니즘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거나 뻘짓하는 정치인들에 혐오를 느껴서였겠지만, 게으르고 무책임한 우리들 자신을 탓해야 한다.


앤서니 다운스의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 가설이 주장하듯, 정치에 대해서 또는 후보에 대해서 연구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에 동조한 매우 합리적인 행동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무관심은 길게 보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인의 50%가 지역 국회의원의 이름을 모르며 75%가 대통령의 임기를 모른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나라도 거의 미국식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긍지를 가져야 하려나...)

민주주의는 현명하게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어울리는 제도다.
조금 끔찍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일도 한번 상상해 보길 바란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국민의 상위 10%가 전체 부의 58.5% (하위 50%가 5.6%),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6.5% (하위 50%가 16%)를 차지하는 불평등 수준을 보였다.
이러다간 자산 또는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한 그리스식 민주주의가 도입되는 것이다.
즉 경제적 노예 수준의 서민 (시민이 아닌..)은 투표권을 아예 안 주거나 반만 주는 제도가 도입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 짐작으론 소득을 기준으로 하든 자산을 기준으로 하든 상위 20%-30% 정도만 투표권을 갖는 시대가 곧 도래할 듯하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손잡고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자산”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슈퍼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문구의 소설에서 인용한다.

"나 같은 수민手民 따위야 민주주의, 공산주의, 푸렝이 뿔갱이 챚을 것 있겄나,

그저 먹자주의가 당세관當世冠이지."


이렇게 살지 말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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