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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Oct 28. 2022

선택

49금 인문학 사전 02.

헤라클레스가 두 여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화려하고 평탄한 쾌락의 길을 보장하는 여신(아프로디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과 박해의 길이지만 미덕의 여신(아테나)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어리석게도(?) 미덕의 여신을 택한다. (나중에 엄청 후회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바가 없다ㅎ) 

비슷하지만 햄릿도 'To be or Not to be'를 놓고 엄청 고민했다. 이를 빗댄 '햄릿 증후군'이란 말도 있다.
현대 사회의 과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선택을 미루거나 남의 선택을 따라 하는 현상을 말한다.
햄릿이나 헤라클레스나 모두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서 했던 고민들이지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하루에 약 150번 정도 선택의 기로에 놓이며 이 중에서 신중한 선택 거리는 약 30개이며, 나중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5차례도 안 된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어떻게 실험을 했을까? 정말 믿거나 말거나의 통계이긴 하다).
오죽하면 인생을 B(Birth)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했을까? 선택은 인간의 일상이자 숙명이라는 말일 테다.
또한 대다수 선택의 결과는 후회로 이어진다는 실험 결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껄껄껄'하면서 죽는단다. 죽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이랬을 껄, 저랬을 껄 하는 후회를 하느라..)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서 최적 안을 택하느라 잠 못 이루고, 그에 따른 선택의 결과에 대해 후회도 만족도 하는 것이리라(물론 후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심지어 이렇게들 말한다.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미래는 선택에 따라 바뀌고, 오늘은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보람 있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결국 행복도 선택이고, 불행도 나의 선택이다.' 

과연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고, 이 선택의 결과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는 것일까?
경영학이나 경제학에서 주장하듯이, 우리 앞에 놓인 여러 선택 대안들의 미래적 결과들을 사전에 예측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가지 않은 길'이 만약에 선택했더라면 내가 예측했던 그대로의 그 길일까? 그 길에 들어서서 다른 길을 택할 걸 하면서 더 큰 후회를 하지는 않을까?


여기서 얼마 전에 션 캐럴의 '빅 픽처'에서 읽은, 좀 알쏭달쏭하지만 그럴듯한 내용을 인용해 본다. 
"물리법칙이 말하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과관계와 완전히 다른 종류임을 이해해야 한다.
우주의 역사는 순간들이 어떤 패턴을 그리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형성되었고, 한순간이 다음 순간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인과의 법칙은 군주제와 마찬가지로 오직 해롭지 않다는 편견 하나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구시대의 유물이다"라고 말했다". 
물리학의 세계에는 선행과 후행이 없으며,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지 않고 그저 과거/현재/미래가 각각 그렇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 모두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일 뿐이다.

어쨌거나 선택에 따른 결과 즉 인과는 사실상 우리의 일상을 설명하는 매우 유용한 화법이며 또한 인간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인간 의식의 중요한 특징이며 선택 행위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83년의 리셋 실험에 따르면 인간이 어떤 의식적 동작을 하기 전에 이미 뇌 활동이 진행되고 있고, 의식에 의해 동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시점에서 '움직이겠다'라는 결정을 (자유 의지로) 한 것처럼'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험 결과로 '자유의지'를 의심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한다.


인간의 삶은 운명일까 아니면 자유의지와 선택의 과정일까?(운명을 주장하기엔 게으르고 비겁한 숙명론자가 될 듯하고, 자유의지를 주장하기엔 너무 자신만만하고 혈기 넘쳐 보인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 개념 아닌가?
그러나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의 스토아학파는 적당히 타협을 한 듯하다.
운명론자들이었음에도 개인의 자유(의지)를 주장했다.
당연히 운명은 '이겨낼 수 없고 제지할 수 없고,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원인'이다.
그런데 그들의 '오이케이오시스 oikeiosis'라는 개념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원리에 따라 맞추어 가는 삶이 바로 '현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운명이 정해준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자유'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익 선생께서는 '行不行力也 至不至命也 (행불행역야 지부지명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능력이고, 도달하느냐 도달하지 못하느냐는 운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일단 열심히 행하고 나서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라는 말씀이시다. (나는 여기서 능력이라고 번역된 것을 선택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즉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본인의 선택이고..'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쉽게 읽힌다)


어찌 됐든 나이가 들어 나를 뒤돌아보고  또한 주위 지인들의 삶을 얼핏 들여다보면, 인간의 선택으로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물론 이런저런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어떤 선택을 했던 것조차도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 즉 내가 내 자유의지로 생각했던 노력이나 선택조차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유의지의 노력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결국 시시포스의 도로(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이며 동시에 링반데룽(길을 잃어 제자리를 맴도는 일)이 될지라도 그저 '盡人事待天命 진인사대천명'을 할 뿐..
마지막으로 '盡人事待天命 진인사대천명' 보다 더 중요한 삶의 자세를 소개하며 끝낸다.  


盡人事待妻命 진인사대처명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마누라의 명령을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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