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부정, 그 사이에 눌린 나의 일상
오늘, 곧, 내일까지...
그 말들을 믿으며, 나는 수백 번의 내일을 건너왔다.
그리고 지금, 그 말들이 도착한 곳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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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처리 중이야.”
"너 나갈 돈 어떡하지? 이렇게 나도 너도 힘들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을 안 했을 텐데 고생시켜셔 너무 미안해."
“내일 되도록 다 확인해 놓고 왔어.”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
일주일이, 한 달이, 결국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조금씩 설득됐다.
“이번에는 들어오겠지.”
“진짜 이번에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기다리면서도,
사실 아마도 이번에도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카드값을 구했고,
대출을 미리 받아 놓기도 했다.
기다림에 기대지 못한 신뢰,
그건 체념에 가까운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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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휴지통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힌 일정이 수백 개 쌓여갔다.
가스라이팅이 별 게 아니다.
이렇게 일정이 밀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무엇이든 이해하며 살아온 나의 생존 방식,
그리고 남편도 끄덕이며 “좀 더 기다려보자”라고 할 정도로
그럴싸한 말들, 정교한 핑계들... 결코 자기 문제는 아니면서 확인도 불가능한 금감원, 은행에서 일처리에 묶인 다른 VIP 고객 문제, 은행 내부 문제...
의심이나 원망은커녕,
오히려 그렇게 애쓰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건강 챙겨야지…” 하고 걱정까지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믿고 싶었다.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안다는 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시간들’을
스스로 배신하는 일 같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만 미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믿은 ‘나’도 미워지는 일.
그래서 ‘이게 사기였구나’는
결코 한순간에 들이치는 번개처럼 오는 게 아닌 것이다.
오히려 퍼즐을 하나씩 맞추다 보면,
‘내가 여기까지 속았구나’ 하고
슬프고 창피한 깨달음이 찾아오는.
혹여 잘못되더라도,
차용증도 있고, 입금 내역도 있고,
서로의 아이도 알고 있는데 문제 될 게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없는 개인 간의 차용이라고 했으니...
이 나이브함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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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줄수록 숫자는 늘어났다.
숫자가 늘어날수록
나는 기록을 더 집요하게 남겼다.
한동안은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었다.
믿는 게 맞는지,
의심하는 내가 나쁜 건지…
혼란과 감정의 균열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녀는 가끔 “정말 너무 미안해…”라고 말하면서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이번에는 확실해. 아무 문제 없이 돼가고 있어”를 반복했다.
그때부터 나는
녹음을 하고, 캡처를 남기고,
대화 도중 ‘이건 나중에 증거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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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시작이 되던 그날,
그녀의 전화를 받았던 건
5호선 맨 끝칸, 행당이나 왕십리쯤.
조심스럽고도 반짝이는 제안이었다.
혹여 너무 과한 제안이었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저 자신은 정말 무리가 없는 선 정도의 돈을 빌려주는 거라며 내가 반대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들을 속삭였다.
나는 정말 내 인생의 귀인을 만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들이
이제 보상받을 차례라고.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었다.
“언니, 고사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언니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인연이 되어 드릴게요.”
그게 그날,
그녀에게 했던 내 진심이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관계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위해 내가 먼저 돈을 좀 보내야 한다는 제안에 조금 이상했지만 내가 모르는 부동산 법인의 세계가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때, 첫 이체는 정말 이 돈 때문에 아이와 이 모든 관계를 저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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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기막힌 우연이었다.
내 출근지가 그 동네였고,
이사 가려던 곳도 그곳이었고,
안 팔리던 집,
이사를 위해 붙잡고 있던 현금,
다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마치 그 사람에게 가기 위해 준비된 것처럼.
그 많은 우연이
그녀에게는 큰 건수를,
나에게는 커다란 상실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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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들이
어제저녁 먹고 남긴 불고기에 밥을 볶는다.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맛인지 느낄 여력도 없으니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니
건강에는 좋겠지 싶어서.
그녀의 거짓된 조언을 떠올리며,
밥을 꼭꼭 씹어 먹는다.
“우리 엄마가 내가 남긴 밥을
절대 먹지 않았던 게 고마웠어.
너도 아이가 남긴 밥 먹지 마.
아이에게 그런 모습 보여주지 마.”
그녀가 했던 그 말이,
지금은 씹을수록 씁쓸한 역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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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이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모습은 뭘까?
나는 되묻는다.
사기꾼에게 되묻고 싶은,
오늘 하루 한 끼가 이렇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