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넘쳤고, 나는 사라졌다.

지나고 나니 보이는 것들 사이에 침잠하기

by 밍밍

언젠가부터 나는
“지금까지 얼마를 보냈지?”
“오늘은 받을 수 있을까? 또 무슨 이유로 연기되려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이 숙제보다,
오늘 저녁 메뉴보다,
돈이 먼저 떠올랐고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애써 지우고 생활을 유지하려다 보니

총 몇 번을 입금했었는지도 고소장을 준비하면 서나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기억했지만 나중엔 그마저 지쳐서 포기했다.
총금액과 함께 기억들만 남아 있었다.
이유가 설득력이 있다는, 어느 순간부터 지연의 사정에 함께 속고 있던 남편에게
“어느 순간부터 같은 패턴이 돌고 있는 것 같은데.”
라고 말했던 나지만
의심하고 나면, 다시 또 믿었다.

아니, 우리 부부는 믿어 보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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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3개월이면 끝난다고 했던 일이
1년 반 동안 열 배로 불어나 있었고,
그 과정 내내 일이 터졌다, 정리됐다를 반복했는데
어떻게 온전히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애쓰는 사람을 의심하는 나 자신을
또 질책했다.

그래서 더 꾹꾹 눌렀다.
의심도, 불편한 감정도.
그리고 스스로를 이렇게 달랬다.
“이렇게 매번 문제가 생겼을 때
증거를 차고 넘치게 남겨주는데, 설마 사기겠어?”
“아이도 서로 알고 친한데 말이야.”

그런데 인생의 모든 재앙은
‘설마’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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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차고 넘치는 증거와
돈을 돌려받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했다.

결국 그녀는
정말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는 듯했고,
변호사를 선임해
경찰 조사를 받고 나왔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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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일상을 살아가는 나는,
이 일을 겪으며 ‘편견’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됐다.

나는 늘
의심을 나쁜 가치로 가르쳐왔고,
악인은 여우나 늑대처럼 생겼다고 생각해 왔다.
이렇게 토끼 같은 선량함으로 무장할 줄은
정말 몰랐다.

돌이켜보면
사기라는 범죄의 특성상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게 기본인데도,
나는 그 기본적인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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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을 통해
나는 나를 돌아본다.

왜 그렇게까지
내 ‘촉’이 아니라, 타인의 말과 이미지에
기댔을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카드론, 현금서비스, 캐피털을 마주하는 순간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녀가 설명을 회피하며
“이건 좀 복잡해서…”라고 넘기던 순간들,
왜 나는 내 권리라며
“이해하든 말든 내 몫이니까 설명하라”라고
따박따박 말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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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나는
나와 내 관계를 다시 보고 있다.

쓸데없이 인내하고,
쓸데없이 배려하고,
내 상황이 허덕이는데도
상대방이 고생하는 게 미안해서
말을 자꾸 삼키던 나를.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안쓰럽게 돌아보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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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당하는 사기란,

한순간에 모든 걸 잃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씩 나를 비워가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은 꼭 지켜야 한다는 나의 신념이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비어있고 거짓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말은 지켜야 한다'라는 나의 신념이,

말이 이렇게 비어 있고 거짓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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