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왜… 수많은 왜들 속에서

이 수렁에 빠진다면 여기가 지옥

by 밍밍

“왜 이야기를 안 했어?”
들었다면 말려줬을 거라며 친구들이 묻는다.


나도 안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녀를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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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완전히 의심하면서
동시에 믿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오래 흔들렸다.

그녀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기에는 거짓이어서는 안 됐다.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철저히 선택이다.

증거들은 어느 쪽이든 심증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지 마음의 방향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스라이팅 범죄도, 사이비 종교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 1년 반을 꾹 참고,
스스로에게 납득을 시켰다.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나를 위해 노력을 한 건데 예상치 못한 일이 자꾸 일어나 지체되고 있는 거라고... 곧 아무 문제 없이 잘 해결될 거고 이런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낸 우리는 정말 가족 같은 사이가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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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냐고 그래도 굳이 묻는다면,
그녀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그 말을 믿지 않으면
내가 너무 어리석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잘 끝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하나를
그때는 놓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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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는
변호인을 선임해 찬찬히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법의 언어와 전략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누구라도 그러하겠지.

나는 고소장을 제출하고도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증거를 정리하고,
카톡을 풀어 설명하고,
경찰서를 오갈 때마다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한다.
내가 진짜 피해자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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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게 내 2억은 그저 숫자일 뿐.
이체 횟수는 통계고, 기록은 목록이다.

무너진 내 일상, 잠 못 든 밤,
아이에게 웃어주지 못했던 시간들까지...
숫자 바깥의 고통은 증거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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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녀는
개인용도로 다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정리한 것일까?
그리고 그걸 다시 풀어내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녀는 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무력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피해자는 늘 더 조심해야 하고, 더 논리적이어야 하고, 더 착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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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지지부진하게
도돌이표가 도는 느낌이다.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사이다가 터졌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권선징악은
현실을 반영한 게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이야기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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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말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때, 돈만큼은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니, 있는 돈은 보냈더라도
대출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더라면.
애초에 그녀를 처음 만난 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조가 되어 그렇게 깊이 엮이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작디작은 선택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우리는 결코 앞날의 일을 미리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은, 아무리 더듬어도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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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도,
나는 돈이 들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무료 물놀이장에 가고,
구에서 하는 가족 캠핑에 참여하며,
열심히 여름방학의 추억을 쌓고 있다.

그녀 때문에 잃은 것이
내 돈과 감정을 넘어서
아이들의 유년 시절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두통이 오고, 우울감이 밀려오고

아이들을 '놀이의 공간'에 데려다 놓고는

정작 나는 에너지가 없어

한쪽에 앉아 있기만 한 껍데기뿐인 셔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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