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었던 도전
고1, 미국 교환학생 즈음
우선, 나는 팩트가 중요한 사람이다. 지금도 아닌 걸 맞다고 하고 맞는 걸 아니라 할 바엔 칼을 맞겠다는 타입?
내가 좀 더 유연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타입이었다면 상황은 좀 나았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하얀 게 까맣다고 하면 그건 까만 거야."라는 엄마의 꾸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가정 내 서열 내 바로 위(즉, 끝에서 두 번째)였던 엄마가 나에게 팁을 주신 걸 수도...
어쨌거나 학창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따돌림보다는 친구 의존도가 문제였을 아이였다. 어렵게 찾아낸 나의 유년기 햇빛 아이도 다 가족보다는 친구들과였다.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신나게 술래잡기, 얼음땡 등을 하다가 언니가 지나가면 제보하지 말아 달라고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씩 상납하던 초등 시절 기억부터 중1 땐 입학성적이 좋아 임원을 하랬는데 반장, 부반장은 부담스러워 선도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힘겨운 중2 시절을 버텨 드디어 신나는 중3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준비물 사러 나갔다가 친구랑 좀 놀고 들어오는데 할머니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거실로 부른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고 하셨다. 무슨 돈인지 묻자 할머니 돈 8만 원이 없어졌다는 거다. 그리고 언니랑 동생은 가져갔을 리가 없고 네가 맨날 밖으로 나도니까 놀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냐며 내놓으라고 했다.
놀려면 몇백 원이라도 돈이 필요한 건 맞다. 그런데 우리 집은 거의 용돈이란 게 없었다. 차비도 마을버스비 ×등교일 계산해서 주신? 그래서 나는 중3이 되고 친구랑 학교를 걸어 다녔다. 1시간 친구와 같이 걸어 다니는 것이 재미도 있고 하굣길엔 중간에 열쇠가게에서 아파트 문 열쇠 구멍 위에 스티커 붙이는 알바도 하고... 놀기 위해 나름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엄마는 성적 말고는 관심이 없었으니 시험만 그럭저럭 잘 보면 됐고, 초등학교 때 안 놀고 집에 오나 복도에 나와 감시하던 할머니도 버스를 타고(지금 찾아보니 마을버스 15 정류장) 다니는 학교까지는 통제를 못하셔서 약간의 자유를 누리던 때이긴 했다. 그렇게 하필 나는 또 8만 원쯤 되는 돈을 모았던 참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내놓으라고, 너무 억울해서 울어도 연기하지 말라고....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존감이 낮던 나는 내 돈을 할머니에게 내놓고 말았다. 그렇게 도둑 누명까지 쓰게 된 나는 억울해서 내가 안 가져갔다고 유서를 쓰고 칼로 손목을 그어보려 했는데 피를 보기는커녕 하얗게 자국만 남아도 너무 아프고.. 너무 무섭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죽으면 미안해하겠지'.. 라 생각했을 때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죽어봐야 나만 손해 아닌가. 그렇게 그냥 하염없이 억울해서 울기만 했던 것 같은데 엄마는 나의 유서와 칼을 보시고도 이 사건을 외면하셨다. 엄마에게 본인의 시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
훗날, 이 사건의 범인은 남동생으로 밝혀지고 결혼까지 하고 문득 생각나 남동생을 추궁하니 기억은 나지 않는다라 하면서도 5만 원은 돌려줬다 ㅎㅎ
아무튼 나는 인생에서 교환학생을 갈 기회를 두 번 얻었었는데 두 번 다 공교롭게도 할머니 때문에 죽겠다... 싶은 시점에 떠나게 되었다.
저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마침 교환학생에 붙었던 참이라 나는 고1 1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겁도 많고, 불안도 높은 나인데 혼자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 가능했던 건... 가족에게 공을 돌린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에서도 친구들이 미친 듯이 그리웠지 가족은 그다지 그립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10개월 정도? 8월쯤 나가서 5월쯤 학교가 끝나고 들어왔던 거 같은데 나의 미국 생활이 펼쳐진다... 펼쳐져야 하는데 별 게 없다......
당시 그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민간 외교관 느낌으로 한국인이 없는 시골 마을에 미국인 가정 홈스테이로 학생을 보내는 거였고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대도시 생활이 아니라 엄청난 시골 생활을 했다. 한국은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고, 미국 애들이 너네 나라도 학교가 있니? 도로가 있니? 이런 걸 물어보면 서울이 이 미국 시골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하며 억울해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심이 불끈불끈 ㅎㅎ
마을에 학교가 없어서 옆 마을로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운전을 못하는 나는 학교 수업만 딱 듣고 집으로 와야 했고(미국의 친목 생활은 방과 후 시작된다 ㅎㅎ), 우리 마을엔 할머니들과 멕시코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컨테이너 하우스였는데, 원래는 어느 정도 형편이 되는 가정만 호스트 패밀리를 할 수 있는데 코디네이터와 친하고, 호스트 가정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이래저래 감옥 간수 일을 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지금 내 아이들 나이의 남매와 그렇게 살게 되었다.
미국 도착한 첫날 저녁 식사로 핫도그(꼬치, 미국에선 코니 도그, 냉동식품) 하나를 줘서 방에서 친구에게 배고프다고 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먹을 게 부족해 일이 주에 한 번 가족 차를 타고 마트에 가면 간식거리를 쟁여 사 왔다가 방에서 쥐가 나오기도 하고 ㅎㅎ 영어를 잘한다면 잘해서 뽑혀 온 건데 학교에서 말은 다 알아듣는데 대답을 잘 못 하니까 "She can't speak English."이런 말을 듣기도 하고 ㅎㅎ
그리고 미국 가정은 아이를 안 때린다는 환상을 와장창 깨고 맨날 싸우고 때리고 ㅎㅎ 결정적으로 학생에게 공부할 방을 꼭 만들어줘야 하는데 나는 4살 아이와 방을 같이 썼다. 4살과 똑같은 크기의 침대가 하나 더 놓아진... 방에 책상 따위는 없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너는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학생에게 공부할 수 있는 방을 제공하지 않는 게 호스트 패밀리 교체를 요구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어 코디에게 문의를 했는데 코디와 내 호스트 맘은 절친이어서 어느 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호스트 맘이 "너 집 바꾸고 싶어? 그럼 바꿔." 이러는데 너무 당황해서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대답해버렸다.
그렇게 나의 미국 생활도 썩 편치는 않았다. 대신 엄청난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 사람들이 오, 미국 가서 영어 많이 늘어왔겠네? 하면 나의 대답은 ㅎㅎ 미국 가서 소랑 나무랑 대화하다 왔지요.
그래도 원가족이랑은 떨어져 있는 만큼 나도 조금은 내적인 작업을 해볼 수 있었던 거 같고, 버텨낼 힘을 얻은 것 같다. 나의 의사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던 집에서 내가 뭘 사고 뭘 입고 먹을지를 결정할 권리를 얻은 것만 해도 인간적인 성장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엄마에게 그간 내가 서운했던 것을 장문의 이메일로도 보내보고 나 이제 진짜 즐겁게 살아야지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사이 남동생이 중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하여 매일 집이 뒤집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미국에 있던 사이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남동생은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을 못했다.
내가 좀 잡초처럼 자랐다면 공주와 왕자인 언니와 남동생은 자기에게 무조건 맞춰주는 사람과만 어울릴 수 있었다. 언니는 그때 막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고 학창 시절에도 운 좋게 늘 남녀공학을 다녔으며 언니를 챙겨주는 남사친이 있는 편? 여자 친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남동생은 남자들의 정글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은 남동생의 반항과 빠따 소리 같은 걸로 가득 차 나의 다짐은 설 곳이 없었다.
당시 조용할 날이 없는 집에 스트레스받아 우니까 정말 어이없는 표정으로 왜 네가 우냐고 묻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에게 애들이 무슨 스트레스가 있냐고 맨날 혼내던 할머니셨는데 본인의 가장 사랑하던 손주가 망가져갈 때에도 공감능력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늘 "넌 집에서 미움받은 대신 밖에서 이쁨 받고 잘 지내는데 우리 손자는 짠해서 어쩌냐..."라고 말씀하셨다.
뭐, 뭐든 과유불급이라고 사랑도 넘치는 게 부족한 것보다 못한 건가...... 양보단 방식이 문제였겠지.
미국에서 공부한 것이 인정은 되지만, 한국 고등학교가 1년이 비면 학업을 따라잡는 것이 치명적이고 사실 미국 10개월이 큰 매릿도 없어 대체로는 교환학생 갔다 오면 1년 꿇는데 나는 거부하고 그냥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학교에.
새로 복학한 학교의 친구들은 그전 동네 친구들보다 공부는 못 했지만 훨씬 착했고, 1년 정도 입시판을 떠나 있다 바로 고2 2학기부터 시작하니 공부에 지치지도 않았던 나는 공부도 곧잘 했지만 노래방과 떡볶이에도 진심인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여전히 반에서 유일하게 핸드폰이 없던 학생이었지만 그런 걸로 이제는 따돌림을 당하진 않았다. 한 번도 학창 시절을 즐거웠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1년 반은 즐거웠던 것도 같다. 야자를 해서 친구들과 저녁까지 먹었었고 집에서는 잠만 잤던 것도 한몫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