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내 생일즈음 첫눈이 온다.
보통 첫눈은 흩날리다 말거나 비단옷을 걸친 선녀처럼 소리 없이 내려와 앉는다.
올해 달랐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이 겨울 왕국이었다.
길도, 나무도, 지붕들도 제 색을 가지건 하나도 없었다. 온통 하얀색으로 변했다.
창문이 액자가 된 듯 어느 쪽을 바라보든 밖은 작품이었다.
미역을 꺼내 물에 담그고 달력을 집어 들었다. 27일 아래 빨간색으로 적은 메모에 눈이 갔다.
"오늘부터 접수네. 첫날 접수하면 모냥(모양-내 기분을 더 잘 표현하려 말투 그대로 썼음) 빠져 보이려나. 일부러 며칠 있다가 할까?"
피식 웃는 오늘은 원서접수의 첫날이다.
4년 전
코로나로 집 밖을 나갈 수 없었을 때였다. 아이들과 24시간 붙어있는 날이 기약 없이 이어졌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나를 제일 힘들게 했던 건 내가 멈춰있는 이 찝찝한 느낌이었다.
망망대해에 표류한 느낌. 대화를 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기대로 없는 이 상황들이 너무 불안했다.
그때 나를 잡아준 비밀 병기가 있었다.
*
며칠째 틈나는 대로 집을 청소 중이었다. 청소라기보다 필요 없는 걸 버리는 작업이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먼지까지 없애버릴 기세였다. 그러다 창고에서 먼지 쌓인 사과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겉에 [소희꺼]라고 네임펜으로 적혀있는데 내용물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보물 상자 속에는 오래된 CD와 몇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책 중에 교과서가 한 권 있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다 버린지 알았던 교과서 한 권이 살아남아있었다.
'대기환경학'
그 책의 생존이 의아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었으니까.
빼곡히 필기가 된 책을 펼쳐보며 그때의 내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키가 작고, 까맣고, 꾸밀 줄 1도 모르는- 밤새 초원을 달려 지금 막 도착한 수줍은 라이온 같은 그녀다.
'아우-'
고개를 흔들며 나의 흑역사를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시기에 못 생겼던 과거까지 떠올라 더 우울했다.
책을 만지작만지작하다 문득 생각했다.
"자격증 시험을 볼까?"
나의 탈출구를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문제집을 샀다. 아닌 척해도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새벽 알람이 다 울리기도 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렇게 길고 어두웠던 코로나 기간 버텼고 자격증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한동안 잊고 있던 공부 도파민을 찾아 또 하나의 일을 저지른다.
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신청을 했다.
처음부터 편입을 생각한건 아니었다. 대학교에 얽매인 것도 아니었다.
학원도 동아리도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그냥 좋아했던 과목과 나를 연결 살 실하나를 놓고 싶은 정도였다.
"내 생각에 맞는 곳이 있으면 공부를 이어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설마 그런데가 있겠어? 하는 속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저 엉뚱한 생각과 단순한 끄적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_지금 하는 일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우선이다. -> 등하교를 해야 하는 일반 대학들은 아쉽지만 안녕~
_내 생활 동선이 어마어마하게 변하지 않는 게 두 번째였다.
_가능한 수업료가 저렴했으면 좋겠고.
_가장 중요했던 건 환경과가 있어야 했다. -> 일반대학교를 제외한 학교 중에 환경과가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한 손으로 말이다.
내 체크 리스트에 얼추 다 들어맞은 곳이 방송통신대학교였다.
큰 꿈을 갖고, 야망을 품고, 졸업 후 밝은 미래를 그리는 게 아니다. 난 20대가 아니다.
아무리 못 생겼었어도 지금보다 라이온 시절이 더 이뻤다고 느낀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내가 어벤저스처럼 지구를 구하는 임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우선 지원해 보자'
40대 대학생을 생각해 본 적도 꿈꾼 적도 없지만 사람일은 모른다.
수북이 쌓인 눈 위에 단풍이 떨어진 오늘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는 하루가 나에게 이어질 수도 있다.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