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雨之情(차우지정), 비 내리는 지우펀에서

by 윤석구

​대만 여행기 네 번째

[​茶雨之情(차우지정),비 내리는 지우펀에서]

​대만을 처음 찾았을 때도 이번 여정에서도 가장 깊은 잔상을 남긴 곳은 단연 지우펀(九份)의 골목이었다. ‘아홉 몫’이라는 이름처럼 예전 물건을 살 때 늘 아홉 인분씩 주문하던 데서 유래했다는 이 산중 마을은 한때 금광으로 이름을 날렸다. 광맥이 마르자 사람들의 발길도 끊겼지만, 영화 '비정성시'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잊혔던 골목은 다시 사람을 맞기 시작했다.

​좁디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고 처마마다 붉은 홍등이 매달려 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만두집, 해산물 노점, 그리고 대만의 진수를 담았다는 차 향이 쇠락했던 광산 마을의 빈틈을 다시 채운다.

간헐적이던 빗줄기는 이내 제법 굵어졌다. 가게와 가게 사이의 천막이 길손의 다정한 비바람막이가 되어준다. 아직 오후였지만 홍등은 이미 밤의 기척을 서둘러 불러오고 있었다. 지우펀의 골목빛은 화려하기보다 어딘가 눅진하고 애틋했다.



​골목 가게마다 “칭츠(請吃)!” 하며 손짓으로 건네는 시식 음식들, 오징어포 한 조각을 받아 씹으니 쫄깃하고 짭조름하다. 무심코 엄지를 치켜세우자 주인은 활짝 웃으며 역시 엄지로 답한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하는 순간이다.

이번 여행의 기승전결을 이끈 龍井 선생은 귀국 후 일행의 가족들에게 전할 선물로 지우펀의 차를 소중히 골라 담았다. 대만에 왔으니 우롱차 한 잔의 여유는 마땅한 도리일 터였다.

​저 멀리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지우펀의 한 찻집, 우리는 먼저 2층 창가로 올라 비 내리는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파노라마로 담아둔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비는 사진 속에서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너머 풍경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하자, 앳된 직원이 고산오룡차(高山烏龍茶)를 정성스레 우려내 보인다. 작은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찻잔을 데운 뒤 그 물을 버리고 다시 차를 우린다. 첫 물은 마시지 않고 버리는 세다(洗茶)의 과정, 찻잎을 깨우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러자 일행 중 제갈공명 버금가는 張 박사가 “우리도 해보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인다. 시범생 못지않은 솜씨다. 손으로 비비고 구워 만들었다는 찻잎에서 은은한 꽃향기와 과일 향이 함께 피어오른다. 우리는 그렇게 우려낸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청심오룡(清心烏龍)이라 했던가. 맑고 깨끗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고 부드러운 여운이 오래 남는다.

​창밖의 빗소리와 주전자에서 나는 물 끓는 소리, 그 순간은 진정 운우지정(雲雨之情)이 아니라 차우지정(茶雨之情)이었다.

​차를 다 마시고 다시 골목으로 나섰다. 삼국지에 나오는 삼발이 솥 ‘정(鼎)’ 모양의 술잔을 찾았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서예용품점에서 붓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토끼털로 만든 세필(細筆)이었다.

문방사우 가운데 가장 벗다운 친구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붓을 든다. 지우펀 골목의 작은 가게에서 붓을 집어 드는 순간 고궁박물관에 즐비했던 벼루들이 아른거렸다. 여행지의 사소한 선택이 뜻밖에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주었다.


​수년 전 마음이 급해 먹물을 서둘러 갈던 시절이 있었다. 갈아도 갈아도 먹빛은 탁했고 마음은 늘 앞서 있었다. 분기탱천하던 그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는 급히 갈아 쓰는 먹물이 아니라 갈고 또 갈아 깊어지는 먹빛처럼, 세상을 조금은 넓게 조금은 깊게, 그리고 한결 느긋하게 바라보게 된다. 어찌 보면 세월이 약일지도, 아니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결국 그 시간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붓 한 자루를 소중히 품에 넣고 지우펀의 골목을 빠져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골목은 여전히 눅진했다. 그날 지우펀에서는 풍경보다 마음이 먼저 젖었다.


​기행문을 쓰는 이 시간, 사진기를 통해 태평양을 향해 담아두었던 풍경을 다시 들여다본다. 黨 총재님과 이사장님의 온후한 얼굴 위로 그날의 비와 차 향, 그리고 지우펀의 골목이 겹쳐진다.

핸드폰 카메라는 지우펀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훑었지만, 내 마음이 받아 적은 것은 그날의 차 향과 당원님들의 따뜻한 온기였다.

2026.1.22. 지우펀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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