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도와 샤먼의 2km, 그리고 평화의 술
대만 여행기 다섯번째 편,
[포탄 속에서 핀 향기, 금문고량주]
- 금문도와 샤먼의 2km, 그리고 평화의 술 -
<좌충우돌 인생2막 83호.2026.2.5>
병오년 적토마의 해를 맞아, 수년 전 시청한 바 있는 90부작 드라마 '삼국지'를 넷플릭스로 다시 정주행 하고 있다. 초선을 사이에 둔 여포와 동탁의 비극, 그리고 조조에서 관우로 이어지는 적토마(赤兎馬)의 기개를 보며 문득 대만 여행의 기억이 겹쳐졌다.
화면 속 영웅들이 청동 솥(鼎) 형태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충성을 다짐할 때마다, 대만 기념품 숍에서 차마 사 오지 못한 그 세 발 술잔에 대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여행길에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밀리언 씨의 동반자, 나(羅) 선생이 선물해 준 금문고량주(金門高粱酒)였다. 대만 여행 3일 차 저녁, 낮에 야류지질공원 인근 '천향'에서 여덟 가지 사방채로 황홀한 점심을 보낸 우리 일행 앞에 나 선생이 만찬장에서 조심스레 보자기를 풀었다.
시내 중심부의 근사한 10인용 테이블 위에 드디어 투명한 병 두 개가 위용을 드러냈다. 黨의 든든한 살림꾼이자 영명(英明)한 박 총장께서 술병을 어루만지며 금문고량주에 얽힌 기막힌 유래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해박한 설명이 곁들여지자, 단순히 도수 높은 술로만 보였던 투명한 액체는 금세 치열한 역사의 증언으로 탈바꿈했다.
병에는 '민국 112년(2023년)'과 '113년(2024년)'이라 적힌 기념 라벨이 선명했다. 묘하게도 라벨 속 문양은 내가 드라마를 보며 떠올렸던 적토마의 '토(兎)'를 품은 계묘년(癸卯年)의 토끼와, 비상을 꿈꾸는 갑진년(甲辰年)의 '용(龍)'이 수수 이삭 사이를 누비는 형상이었다.
박 총장의 이야기와 술병 위의 간지(干支)가 맞물리며, 삼국지의 영웅담은 그렇게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 투명한 병 속에는 영웅담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 치열한 생존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금문고량주의 고향인 금문도는 대만 본토보다 중국 본토에 훨씬 가깝다. 샤먼(厦門)과는 불과 2km 거리, 맑은 날이면 대륙의 창문까지 보인다는 이 작은 섬은 1949년 국공내전 이후 대만의 최전방 방패가 되었다.
1958년 8월 23일, 중국군은 금문도를 향해 44일간 무려 47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역사는 이를 '823 포격전'이라 부른다.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척박한 화강암 섬에서 사람들을 살린 것은 수수(高粱)였다. 당시 방위 사령관 호련 장군은 쌀을 구하기 힘든 이들을 위해 수수를 심게 했고, "수수를 가져오면 쌀로 바꿔주겠다"는 신의 한 수로 민생과 군수품을 동시에 해결했다. 화강암 암반수를 머금고, 전쟁의 상흔이 새겨진 차가운 방공호 안에서 숙성된 이 술은 그 도수만큼이나 뜨겁고 강렬하다. 58도, 붉은 포탄이 쏟아지던 섬에서 붉은 수수가 자라나 투명한 향기로 승화된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이 술을 마시지 못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술들이 놓여 있었고, 나 선생은 "다음을 기약하라"며 두 병을 다시 소중히 싸주었다. 귀국길에 그 두 병을 품고 돌아오며 다짐했다. 오는 2월, 여행 뒤풀이 자리에서 이 술을 개봉하리라고. 벌써 목구멍 너머로 그 뜨겁고 고결한 향이 차오르는 듯하다.
금문도와 샤먼의 2km를 떠올리니 문득 개성공단이 겹쳐졌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나는 남과 북이 마주한 그곳에서 1,188일을 보냈다. 북측 동료들과 나눴던 개성소주와 들쭉술 등 우리도 함께 잔을 기울이며 평화를 이야기했었다. 금문고량주가 포탄 속에서 핀 수수의 향기라면, 개성의 술들은 분단 속에서 싹튼 화해의 씨앗 아니었을까.
羅 선생의 정성 어린 포장을 풀며 확인한 것은 술병보다 더 따뜻한 그분의 진심이었다. 비록 세 발 달린 청동 잔(鼎)은 없었으나, 그 마음만으로도 내 마음의 잔은 이미 넘치도록 가득했다. 올가을, 밀리언 씨와 나 선생을 한국으로 초대할 때에는 우리네 건강증진의 최고 술 인삼주(人蔘酒) 석 잔에 기절초풍 한 복분자(復盆子) 함께 이 귀한 정에 답례하려 한다.
이제 곧 다가올 뒤풀이 자리, 黨 총재님과 함께 이 58도의 강렬한 술을 나누며 포탄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평화의 의미를 되새길 것이다. 금문도의 수수 향기가 분단의 땅에서 빚어진 우리의 이야기와 만나는 날, 그 투명한 술잔 속에 통일의 꿈도 한 잔의 향기로 담겨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2026.1.22
타이베이에서 by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