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 홍콩 거리 위에서 웃다

퇴사 후,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존재했던 날

by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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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대신 엄마라는 아내라는 역할로만 살아왔던 시간들.

그 도시의 밤거리 위에서, 나는 정말 오랫만에 '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캐리어를 끌며, 나는 처음으로 가벼웠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가족의 짐도 들지 않았고, 신랑이나 아이들의 식사를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작은 캐리어 안에는 오롯이 나를 위한 것만 들어 있었다.
아이 간식 대신 핸드크림, 남편의 셔츠 대신 화사한 셔링 블라우스.
퇴사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내가 나를 위해 움직인다' 는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오래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았다.
간호사였고, 엄마였고, 아내였다.
그 역할들을 성실히 수행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나를 밀어냈다.
돌아보면 매일매일이 감당하기 버겨운 책임의 연속이었고, 주어진 일상의 틀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그날, 나는 비행기 이륙보다도 먼저 내 안의 '나'가 일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홍콩 거리 위에서, 나는 웃고 있었다

도시의 공기는 낯설고 붐볐지만, 그 안의 나는 놀랍도록 익숙했다.
침사추이의 야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페리 선착장 앞에서 핫도그를 베어물며 웃었다.
복잡하게 얽힌 거리와 꺾인 골목에서 나는 오히려 단순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냥, 나.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정체성.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
더 이상 계획표에 갇히지 않고, 하루를 내 맘대로 굴릴 수 있는 나.

바쁜 출근길 차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나는 아무 목적지도 없이 걷고 있었다.
걷고, 멈추고, 가게 앞에서 구경하고, 커피 냄새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그 혼란조차 좋았다. 누구의 시선도 없고, 판단도 없는 그런 하루는 상상보다 훨씬 더 깊은 해방감을 주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참 길었다.
한끼를 먹고, 노을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마치 스무 살 시절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하나하나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작은 감정들이 나를 바꾸고 있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나로서 살아가는 감각'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여행은 자유가 아니라 회복이다

이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했던 건 '힐링'이나 '휴식'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안에 덮어둔 목소리를 다시 꺼내고 싶었다.
늘 언제나 한결같이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를 외치던 내 안에서
진짜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 질문의 답을 나는 홍콩의 익명성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불 꺼진 카페 앞에서, 신호 대기 중 잠시 멈춰 선 횡단보도에서,
멋도 없이 웃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여행은 짧았다.
며칠 사이 나는 다시 가족이 있는 집으로, 일상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이제는 내 안의 '나'를 놓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홍콩 거리 위에서 웃던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웃음은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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