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마지막 한 마디

이제라도 가도 좋으냐고

by 이슬

스물다섯 삼월 쌀쌀한 한나절

햇살이 창문을 비추는 것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전화벨이 울렸고 “그렇게 재미있어요?” 하며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도망쳐 온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2년쯤 되어가던 때

그녀를 지켜보던 지인이 한번 만나보라며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동료들이 모두 퇴근을 한 후 피아노 연습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보냈다.

직장 상사였던 지인의 눈에는 그녀가, 시간만 되면 퇴근하기 바쁜, 다른 이들과 달라 보였던 것 같다.


지인은 그녀에게 자기 친구 처남을 소개해 주었다.

쌀쌀한 겨울 첫눈이 내려 하얗게 변해버린 거리를 바라보며

레스토랑에서 그들은 마주 앉았다.

눈이 내린 들판


입사하자마자 첫선을 본다는 그는 다소 긴장한 듯했다.

키가 컸고 눈매가 선해 보였다. 가톨릭 신자여서 세례명이 미카엘이라 했다.

오돌토돌한 작은 비립종 같은 여드름이 옆 볼에 촘촘하게 올라와 있었다.

가는 실핏줄이 푸른빛 붉은빛으로 보이는 피부가 눈에 거슬렸다.

사실 결혼에 대한 계획도 생각도 없었던 그녀는 그와 만남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그는 매일 전화를 해댔다.

직장으로 집으로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그런 그를 보면서 ‘참 유별난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는 방송국에 근무했다.

방송국에서 이벤트가 있거나 좋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함께 가자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과 그와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이 두려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오른 나무의 푸른 잎이 나날이 짙어가던 어느 날

그가 한국민속촌에 가자고 했다.

중앙대 입구 84번 버스 정류장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한국민속촌에 가는 차를 타기 위해 대로변을 향해 걸어갔다.


한 발짝 뒤떨어져 걷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아무 말도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그도 뒤돌아서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 동네 지리에 익숙한 그녀는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작은 가게에 몸을 숨겼다.


뒤 쫓아온 그가 그녀를 놓치고 실망하며

돌아서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네다섯 시쯤 그는 “그렇게 재미있었냐?”며 전화기 속에서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 번은 그가 살고 있는 연희동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그의 모친을 모시고 나타났다.

그녀는 참 당황스러웠다.


팔순이 넘은 그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우리 아들 잘 만나라며 좋아하셨다.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며 갑자기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얼떨결에 그의 집에 가게 된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가족들이 화목해 보였고

막내아들 장가보내서 손주 안아보면 여한이 없다는 모친의 말씀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높은 기대에 중압감을 느꼈다.

갑자기 손주라는 말을 듣고 닭살이 돋았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몰아닥치는 그들의 소망과 요구에 덜컥 겁이 났다.


그 후 그의 줄기찬 요구를 무시하며 많은 날이 지나갔다.

조건은 딱히 나무랄 것이 없었는데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그런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 5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그녀가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그녀는 문득 측은 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그는 결혼하고 싶다며 결혼하자고 했다. 아니면 약혼이라도.


이별을 말하러 왔는데 청혼이라니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참 좋은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좋은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전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습니다.”


찻집을 나와 길을 걸었다.

비가 오자 그는 우산을 씌워 주었다.

걸어오면서 그가 미련을 갖지 않게 해주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감사해요.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저는 그냥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 도대체 어떤 사람을 원하세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변신할게요.”

“ 죄송해요. 혹시나 하는 맘도 같지 마세요. 전 친구 이상의 관계는 원치 않습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점점 그녀의 집에 가까워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내려다보며

“좋아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보고 맘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그땐 내게 와요.

서른이 돼도 좋고 마흔이 돼도 좋아요”

비 오는 날


그리고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약혼하고 결혼하는 과정 중에도 그는 가끔 연락하곤 했지만

차마 약혼한다는 결혼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결혼하기 바로 전날 그는 결혼을 축하한다며 행복하게 잘 살라며 축복하여 주었다.


그녀를 그렇게 원했던 이를

한 푼어치의 미련도 없이 단칼에 보내고 선택한 삶을 살면서

왜 문득문득 그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는지 모른다.


외롭고 고독할 때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보고 그래도 맘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내게 와요!” 하던

그의 말이 불쑥불쑥 들려왔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은 살아가는 내내 메아리처럼 어디에선가 들려오곤 했다.


남녀의 만남과 이별이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진실한 맘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굳이 남녀 간의 만남이 아니더라도

많이 사랑한 사람의 진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사랑을 받은 이의 영혼 속에서 빛이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고 좌절할 일도 아닌 듯하다.


이젠 얼굴도 이름도 잊혔지만

“서른이 되고 마흔이 돼도 좋으니 내게 와요.”라는 마지막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육십 고개를 넘은 내가 이제라도 가도 좋으냐고

스무 살 청춘이었던 그에게 답장을 쓴다.

그의 빈 가슴이 채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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