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어부
부제: 지혜로운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는 방법
“바람피울까 봐 와 봤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내지른 나의 한마디에
현장을 들킨 그녀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그녀들은 정감 있어 보였고,
그 속에 섞여 식사하며 행복한 남편 모습에 나도 행복했다.
남편이 있는 광양으로 내려갔다.
‘여수 남파랑 캠 비치’를 개장해,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항상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것이 고정 레퍼토리(Repertory)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도 알아야지” 하며 다투는 게 우리 부부의 첫 번째 일상이다.
남편은 내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 변해버린 내 모습에
깜짝 놀라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날이 피폐해지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서울에 살겠다는 내 결심을 변하지 않았다.
6개월인가를 방황하던 남편은 사두었던 바닷가 구릉지에서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했다.
가까이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토·일요일이면 이산, 저산, 이 둘레길, 저 둘레길을 걸으며
아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우며 살아갔다.
그때 가족 카톡방에 올린 사진들을 보면
슬픔과 외로움에 찌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 가슴 한쪽이
‘왜 저렇게 살아. 다른 여자도 만나고 신나게 살지.’
시니컬했다.
그런데 남편은 가는 곳마다 씨를 뿌리며
사람 낚는 어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듯하다.
오늘도 여자 손님들이 여덟 명이 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삼 년 전 섬 둘레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연락처를 남겼고
남편의 개장 소식을 듣고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남편은 찌들지도 않았고 기가 죽지도 않았다.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살아 있었고 불굴의 투지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남편은 나름 사는 방법을 찾아냈고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사업을 시작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땅에 휴양지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맨손으로 시작했다.
인부와 기계의 투입을 최소화한 채 자신이 모든 일을 해냈다.
흙을 고르고 돌담을 쌓고 돌담 틈새마다
연산 홍을 비롯한 나무들을 심었다.
나는 어쩌다 한 번 둘러서 흉내만 내다 돌아오며 투덜대면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것이 남편의 두 번째 레퍼토리이다.
남편은 대기업에 입사하여 평생을 헌신했다.
그 기업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장학회 회장을 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서울로 남편이 직장을 옮기던지
서울 본사로 이동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전공이 기계이기 때문에 현장에 있어야 한다며 버텼다.
그래서 나의 방랑 생활은 시작됐다. 서울, 경북, 경남, 전남으로….
남편은 그 기업의 산증인이다.
특히 설비 증설 과정부터 현장 곳곳에 남편의 땀과 열정이 어려있다.
젊음과 꿈 모든 것을 바친 삶의 터전이었다.
남편은 능력이 있었고 특히 사람 관계를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상사 모시기의 달인, 부하직원 챙기기의 고수,
남편을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승진에서도 계장이 제일 빨리 되었고 과장, 부장도 남들보다 빨랐다.
당시 직장 있는 아내를 둔 남편들을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승진에서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금기를 깨고 부장까지 고속 승진했다.
동료나 일 년 차 선배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비난을 뚫고,
차장이었을 때는 부하직원 노조 관련한 일로
담당 상무에게 좌천 당 하기도 했다.
그때 남편은 분노했다. 위기였다.
아내로서 내조를 다 하지 못한 내 탓인가 싶어 미안했다.
현장 사택은 견제와 시샘과 여자들의 조용한 암투로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항시 터질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이 흐르곤 했다.
나는 직장 다닌다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았다.
말, 행동 하나하나가 그대로 회사 고과에 반영이 되었고
여자들의 치맛바람은 거셌다.
낮에는 직장 밤에는 애들 돌보기에 정신이 없는 나는
그런 분위기를 알지 못했다.
또한 남편은 여자들이 나 대는 것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난 그냥 내 할 일만 했다.
하지만 남편의 능력을 눈여겨본 다른 부서 상무님과
포항으로 갔다 돌아오신 선배 전무님이 암암리에 남편 구하기에 나섰고
보란 듯이 부장으로 승진했다.
덕분에 나도 드디어 부장 사모님이 된 것이다.
너무 기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직장 다니는 아내가 있는데도 부장으로 승진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부장이 되면 사모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내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한 소장 사모님 말씀이 있었다.
부장이 되면 그만큼 보이지 않는 아내의 내조가 중요해진다는 말씀이었다.
사실 현장에는 남편을 내조해야 하는 일이 많기도 했다.
현장 직원들을 한마음으로 묶기 위해 계장 단위, 과장 단위, 부장 단위 행사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가족을 동반해야 했다.
현장에 안전사고도 많고 온종일 한 사무실에서 지내고 나와서도
사택에서 살아야 하니 무엇보다 친화력이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의 계급이 그 가정의 계급이 되었다.
남편이 내게 항상 하는 말은 '죽은 듯이 지내라'는 말이었다.
말 한마디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며
더 조심하고 더 겸손해야 한다고 절대 나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나는 그 명령을 따랐다.
그 후 남편을 좌천시켰던 상무는 얼마지 않아 보직을 옮겼고,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남편은 빛나는 별이었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헌신
탁월한 직무 감각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시사 기획 창’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남편이 추진하는 과제가 그만큼 파급력이 크고
타 기업에서도 벤치마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회장님과 고위 임원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남편은 임원이 되었다. 차기 현장소장으로 내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었고
남편에게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냈던 임원진이 모두 교체되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던 분이 회장이 되면서
현장 중심이었던 패러다임(Paradigm)이 연구실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현장 경험이 없는 부장과 소장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왔고
현장에서 뼈를 묻었던 이들이 주변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전사고가 더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 기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남편이 현장 설비 증설에 초석을 세우는 데 일조했고,
그 기업 부흥의 공신이었다고 자부한다.
사고가 나면 열흘이 넘도록 귀가도 하지 않고 현장을 지휘했던
남편의 지도력은 현장의 신화로 남았다.
아내를 남겨두고 송도에 있는 자 회사 임원으로 8년을 근무했다.
일 년 후엔 돌아온다며 피 말리던 1년이 8년째 되는 날
남편은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현직에서 쓸쓸하게 퇴장했다.
그 후 협력사 대표를 거쳐 타 기업 그룹 협력사에 고문으로
5년간 근무하다 본인의 사업을 시작했다.
남편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남편의 사람이 된다.
그러니 스쳐 가는 길가에서 만난 여인들을
자기가 운영하는 사업장에 고객으로
유치할 수 있는 남편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몸담았던 그 기업을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상무, 전무가 된 부하직원들이 아직도 남편을 찾는다.
현직을 떠난 상사들도 남편을 찾는다.
하지만 그 기업에서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남편에게 한이 되었고 많은 좌절과 절망의 고통을 주었다.
그런 남편을 두고 서울로 온 나는 나쁜 아내다.
남편만 바라보며 살던 아내의 외출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게만 가혹하다고 느꼈던 남편의 행동이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요즘은 조금씩 느낀다.
그동안은 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며
남편에게 매일 큰소리를 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도 잘못한 것이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남편은 오늘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해. 당신은 그냥 누리기만 하면 된다니까.
내가 그렇게 해줄게.”라고 말하며 내 마음을 낚아보려 노력한다.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사람을 다 낚았지만
아내 마음만은 아직도 못 낚은 것
같다고 말한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자기식의 사랑을 고집하는 그는
언제나 남의 편인 남편이다.
나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한다.
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고 하고 싶은 일도 참 많다.
옆구리에 차고 다니고 싶은 사람과
자유로운 세상으로 훨훨 날고 싶은 사람,
지혜로운 남편과 아내로 살아내기 위한 비법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