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부제: 사랑으로 사랑을 잃어버린 아이러니

by 이슬

사도세자라는 영화를 보았다. 비극의 왕세자 사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조라는 아버지가 만든 세계 속에 갇힌 채 창공으로 날아가는 새들처럼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었던, 안타까운 운명의 소유자였다. 활시위를 당기며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저들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라고 외치던 절규가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어린 사도는 높은 성취 압력으로 발생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좌절과 상처를 받는다. 지속적인 실패 경험으로 주눅이 들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애석하게도 사도세자는 누구보다 영특한 자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잘못된 양육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아비가 만든 형벌의 틀에 갇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왕의 유일한 아들이었음에도 뒤주 속에 갇힌 채 굶어서 죽는 운명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보인 반응들은 참으로 놀랍다. 공포와 불안, 두려움에 떨었고, 옷을 입지 못하는 의대증(衣帶症), 발작 등 부적응 현상들이 날로 심화하였다. 나중에는 신하들을 참수하는가 하면 급기야 아버지 영조를 죽이겠다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사도3.jpg

영조와 사도의 사례는 부모의 잘못된 양육과 교육방식이 자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그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사례다.

영조의 양육 태도는 발달 단계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과업 제시와 과제 수행에 따른 부정적 피드백에 문제가 있었다. 지속적인 실패는 자존감을 해치고 탐구심과 성취동기를 말살하게 된다. 과업의 제시도 일방적이었기에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했다. 또한 문제해결에 실패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절한 힌트를 주고 격려를 통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었더라면 사도세자는 높은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되어 더욱더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자기 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조와 사도의 이야기는 지난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요즘 교실에서 문제가 되는 과잉 행동장애(ADHD)는 물론, 학습을 포기한 무기력한 행동들도 이와 같은 원인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발달 단계보다 높은 성취 압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잦은 실패 경험과 과도한 선행학습으로 학습에 대한 흥미 상실은 물론 심리․정서적 요인으로 다양한 문제 행동들이 나타난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고집, 소란, 무질서, 주의 산만 등으로 발현되다가 고학년부터 탈선, 비행, 폭력 등의 문제로 심화한다.

사도세자에게 나타났던 문제 행동들이 이들에게서도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영조가 다른 방법의 양육을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사도세자는 학습 능력도 우수했고 호기심도 많았으며 예술적인 기질도 높았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가 가졌던 예술적인 감수성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수용하고 격려했다면 사도세자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멋지고 활기찬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학자는 생애 초기(0~5년)에 심리․정서적 발달이 거의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초기 발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육환경과 양육자와의 관계의 질에 있다. 오늘날 맞벌이 가정의 폭발적인 증가는 양질의 발달 환경 제공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방증(傍證)이다. 부모와의 애착이 형성되기도 전에 공동 육아 시설을 전전하는 것은 차가운 철제 인형 옆에서 사는 원숭이와 같다.

물리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심리․정서적인 환경이 아동 발달에는 더욱 중요하며, 그 어떤 것보다 선행되는 요인이다. 양육자와의 상호관계를 통해 인간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배우는 것이다.

최초의 양육자 역할을 하는 이들은 특히 발달 과정에 대한 상식이 필요하다. 또한 완벽한 부모가 아닌 충분한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완벽한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를 뜻한다. 충분한 부모는 아이가 꼭 필요로 하는 부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하게 하는 부모를 의미하며,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양육자를 말한다. 지나친 간섭과 부모가 생각하는 틀에 아이를 맞추려는 모든 행위는 사실은 폭력이다.


‘에릭 칸텔’은 “긍정적인 사고를 자주 경험하면 신경세포의 구조가 개체의 잠재 능력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변화한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교육학에서 말하는 피그말리온 효과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도세자1.jpg

영조의 극단적인 선택은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괴롭혔다. 자식을 잘 키워보려는 과도한 욕심 때문에 아버지로서 실패했고 불행했다. 그로 인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아버지에게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삶도 비극으로 끝났다.

사도세자의 불행은 결코 어제의 일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다.

금쪽이, 이혼 숙려 캠프 등 TV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부정적인 함수관계가 성년의 부부관계로 비화하는 것을 본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 형성 과정이 무의식의 뇌 해마에 각인되어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족과 형제, 연인, 부부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 정녕 소자를 죽이시렵니까?”

사도세자의 절규가 허공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들, 그래서 더 잘 키워보고 싶었던 아들, 그 아들의 저주 같은 절규를 안고 영조는 남은 생을 살았다.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쓸쓸한 바람결에 어디선가 두 영혼이 서로를 부르짖으며 찾고 있는 듯하다.

사랑도 상대가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사랑이다. 사랑으로 사랑을 잃어버린 아이러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이전 19화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