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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1. 2023

백신 대신

나무인간 20

2021년 9월 13일


오전 11시쯤 당일예약으로 1차 백신을 접종하려 동네 내과를 찾았다. 곧장 들어갔다가 외래 진료서를 작성하고 오라는 주문에 급히 입구로 돌아섰다. 외국 출입, 양성 판정 유무 같은 상투적인 확인란에 아니요, 아니요를 연거푸 체크하고 간호사에게 다시 내밀었다. 조금 있다 내 이름이 불렸다. 우선 혈압을 쟀다. 220이 나왔다. 확인 차 다시 쟀다. 213이 나왔다. 의사는 보통의 경우 백신 투약이 가능한 최대 혈압수치가 160이라며 내가 지금 상태로 백신을 맞을 경우 잘못될, 그러니까 사요나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위험한 부작용을 설명하는 의사가 접종대상자에게 양손으로 날갯짓하며 '사요나라'라니,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백전노장 같은 그의 괴상한 위트가 마음에 들었다. 원하면 바로 자리에서 검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러고 싶다고 말했다. 혈액, 소변, 심전도 검사를 했다. 의사는 심전도 그래프를 보면서 누워 있는 내게 심비대증 또는 심혈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다시 한번 가슴에 뻐근함을 느끼면 바로 종합병원에 가야 한다며 의뢰서까지 써줬다. 지독한 위트와 친절이라니. 츤데레 의사의 마지막 권고는 일단 미량의 혈압약 10일 치 복용 후, 오늘 검사 결과를 가지고 다시 상태를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접종은 늦어질 테지만 지금 이 상태론 백신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내게 설명했다. 병원은 오전부터 화이자 잔여백신 예약자로 분주했다. 아마도 오늘 내가 그 병원에서 접종에 실패한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집에선 조금 걸음이 있는 의원이라 그 근처가 아닌 집 앞 단골약국으로 향했다. 나를 잘 아는 약사는 처방전을 보곤 혈압이 얼마나 나왔냐고 물었다. 내가 수치를 알려주자 믿을 수 없단 눈빛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처음 내 혈압을 확인한 의사의 눈빛과 유사했다.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뒤로 하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미 알고 있었고, 어쩌면 충분히 짐작했던 일이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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