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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1. 2023

바지 주머니 속 두 계절이 남았다

나무인간 19

2021년 9월 27일 


나는 역사(歷史)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그래서 어쩌다 특강 나가면 미대생들에게 “무엇을 하려거나, 되려 하지 마세요. 그저 자신을 말할 줄 알면 됩니다. 방법이 미술이든 무엇이든 간에.”라고 떠들었다. 그런 내가 '사요나라'가 싫어 지난주 월요일부터 하루 네 번, 몇 가지 약을 매일 복용하고 있다. 약의 목적은 혈압강하, 심부전, 동맥경화, 지방간, 고지혈증 치료이다. 알아봤더니 이 정도면 거의 저승행 급행열차 수준이다. 가족 성화에 못 이겨 올해가 가기 전 약속한 종합검진 때 예고된 참사를 일단 면한 셈이다. 지금 든 생각인데 젊어서 혈관이 버티고 있어 다행이라는, 내 나이를 모르는 약사의 위로는 참 아이러니하다. 하긴 수치를 밝혔을 때 나를 마치 워킹데드 보는듯한 그녀의 눈빛도 잊히질 않는다.


쇠질에 빠져 있었다. 헬창은 아니어도 유튜브에 구독하는 운동채널도 많고, 유산소보단 무산소 운동에 치중했다. 멋진 몸보단 힘을 유연하게 잘 쓰는 신체를 갖고 싶었다. 당연한 경고지만 의사가 유산소는 하되 무리한 근육운동은 안 된다고. 그리고 선천적으로 머리 왼쪽으로 올라가는 혈류가 오른쪽보다 훨씬 많으니 가급적 머리는 오른쪽으로 두고 평소 활동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알려줬다. 왼쪽으로 무거운 걸 들다가 자칫 큰일 날 수 있다는 뜻이다. 쇠질 하다 뇌출혈로 가고 싶진 않아서 그 말은 좀 무서웠다.


약기운에 낮잠을 자주 잔다. 자연스레 근육의 긴장도 약해졌다. 사실 며칠 전 주의를 무시하고 바로 뒤 근린공원에 설치된 벤치프레스를 했다. 갑자기 무거운 걸 들고 싶었다. 고작 2 세트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팔꿈치가 뜨거웠다. 잘못 들었다. 기본운동도 안 하고 산보하다가 무심결에 일을 저지른 대가였다. 내켜서 하는 일은 늘 후회가 따른다. 익히 알면서 나는 종종 아파도 원하는 걸 꾸역꾸역 한다. 어린아이라면 나가 놀기 위해 안 아프다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굳이 핑계라면 내가 백치이거나 아니면 백치미 때문이다. 


혈압 약의 긍정적 부작용은 어지럼증과 체온 상승이다. 혈압은 많이 낮아졌고(그럼에도 고혈압) 약간의 어지럼도 금방 적응했지만 더워진 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나는 촌스러워 계절에 민감하다. 더우면 하수구의 끈적한 냄새를, 비가 내리면 눅눅한 망령을, 눈이 오면 여백의 캔버스 같은 창밖을 사랑한다. 과거 이미 계절 하날 잃어버린 나는 눈앞에서 만질 수 없는 가을을 바라보기가 억울하다. 곧 10월이다. 밤새 내 집 실외기만 웅웅거린다. 미세한 변화가 계절과 함께 찾아왔고, 역사까진 아니라도 해둔 게 워낙 없어 이번 겨울을 잘 준비하고 싶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김경주의 시가 머릿속에 맴돈다. 시의 내용과 내 역사는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다만 그럴 때가 있다. 두서없이 제목만 뇌까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남은 혈압 약 다 먹고도 주변 어딘가에 가을이 조금 남아 있으면 좋겠다. 솔직히 엄살 좀 떨다가 다시 멀쩡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젠 그럴 수 없지만 그냥 아픈 거 잘 참고 즐기던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 덥다. 오늘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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