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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1. 2023

그 남자의 책

나무인간 18

2021년 9월 3일



어제 강남 교보에 갔다. 시집을 둬 적거리다 문득 고루하단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까닭을 알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시와 소설 구역을 맴돌았다. 서성이던 걸음이 역사, 인문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마지막 에세이 판매대에서 '사물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진열대에 얹힌 모양이, 코로나 때문에 조용히 은퇴한 저자 안규철 선생님이 반가웠다. 갑자기 발동이 걸렸다. 검색대에서 선생님 이름을 검색한 후 C0-20 구역을 찾았다. C구역을 한참 두리번거리다 '그 남자의 가방'을 어렵게 찾았다. 강남에 남은 마지막 재고였다. 좋은 책 거저 주운 마냥 설렜다. 


사실 나는 게으르고 고집스러운 학생이었다. 선생님들 책 살 돈도, 여유도 없었다. 원래 반골성향에다가 대학생일 때조차 늘 어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3학년 2학긴가 4학년 1학기 심사 때, 안 선생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뇌리에 뚜렷하다. "나무군, 나무 군은 동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나?" 지금 나라면 아주 근사하게 답변할 수 있겠지만 그땐 "네? 아, 그러니까..." 이렇게 형편없이 얼버무렸다. 대답할 준비도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패기와 오기만으로 그림만 그리다 죽겠다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2년 전 175 갤러리가 안국빌딩에서 있던 마지막 해 봄, 전시 기획 공모에 선정되면서 졸업한 지 10여 년 만에 선생님을 마주했다. 내가 철없이 미워한 선생님이 내 텍스트를, 내 전시구성과 기획을 인정해 주신 것에 내심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전시기획으로 선정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미디어와 오브제를 설치, 전시했다. 


선생님과 오프닝 후 막걸리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이후 시에서 주체하는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진 못했다. 은사이신 곽남신 선생님께선 자리를 지켜주셨다. 유목민에서 가진 조촐한 뒤풀이에서 곽영감님은 내게 "야, 인마. 너 그럴 거면 다시 작업을 해."라며 다그치셨다. 그때도 "선생님, 저는 글 쓰는 게 더 좋아요."라고 얼버무렸다. 평소엔 말을 꽤 잘하는데 선생님들만 만나면 나는 곧잘 얼버무린다. 이건 무슨 능력인지, 여하튼 안 선생님 책 두 권 사니까 묘한 연민과 호기심에 곽 선생님 저서를 검색했다. 절판이 의심되는 '재고 없음'이 떴다. 광화문점에 현대판화사 역서가 한 권 남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곽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사랑받으며 졸업했음에도 판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남자의 가방'은 좋은 책이다. 차분하고 단호한 예전 안규철 선생님의 사유가 단단한 문어체로 다가온다. 변화 탓인지 이제와 선생님의 책을 구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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