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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

나무인간 5

by 나무인간

2020년 10월 24일


마르고 찬란한 날이다. 이제 사무실에서 자기도 제법 춥다. 밤새려면 옷가지 좀 챙겨 놔야겠다. 여름엔 그토록 창가 자릴 원했는데 계절이 바뀌니 안쪽도 나쁘지 않다. 유리닭장도 익숙해지나 보다. 올해도 신춘문예 낼 글을 정리하고 있다. 8년째다. 오대수가 매일 저녁 군만두를 먹으며 복수를 다짐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누구 말 대로 참 돈 버는 재주가 없다. 글을 엄청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이래 저래 그냥 기획하고 글이나 쓰는, 이런 4차 산업시대 생존형 한량이 어딨 나.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지 싶다.

사무실 계약기간도 다음 달이 마지막이다. 삼성동은 아저씨들 놀이 터지 글 쓸 동넨 못 된다. 만약 다시 사무실을 공유오피스에 구한다면 다음엔 여의도 패스트 파이브에 1인실로 할 생각이다. 저번에 문의 차 들렸을 때 보니 단단하고 어두운 서재 분위기가 좋았다. 여의도는 금융인들이 서브 개념으로 사무실을 쓰고 있어 다른 지점과 달리 젠틀하다고 매니저가 귀띔해줬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강남에 밀집한 공유오피스들 속을 가만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업체보다 요란한 뜨내기들이 많다. 나처럼 여유 없는 창업자에겐 공유사무실을 보증금 없이 장기 전대차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내가 그들의 시끄러운 열정을 막을 재간은 없다. 방음은 매우 중요하다. 어쨌거나 집에서도 급행으로 3 정거장이니 일반을 타거나, 서서 간다 해도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 가을 하늘 아래 걷기 좋은 동네다. 물론 겨울엔 정말 믿도 끝도 없이 적막한 빌딩숲뿐이지만.

웹진을 준비하다 자금이 부족해 잠시 멈추었다. 처음 사업이란 걸 해 보려니 임대료와 인건비는 끔찍할 정도의 출혈이었다. 그 미안함에 지금도 떠난 부사수가 꿈에 종종 나온다. 나는 성공적 소액창업 = 스타트업이란 송출용 환상에 빠져 있었다. 괴랄한 회사가 망하고 월급도 못 받으니 자금은 금방 동이 났다. 총알이 없으니 힘이 빠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일부였다.

남은 한 달 여 동안 무얼 할 수 있을까. 영어과외를 할까. 글을 미친 듯이 써볼까. 아니면 팔만한 소품용 그림을 그릴까. 어쨌거나 용팔이 차팔이 미술글팔이다. 서울문화재단에 지원하기엔 이제 그들이 정한 청년 축에 끼지도 못하고, 아르코에 지원하기엔 내 경력은 너무 허접하다. 미술계에서 마흔은 정말 끼인, 아니 까이는 나이다. 솔직히 미술계에 대한 회의도 있고, 기획은 하고 싶은데 너무 돈이 안되니까,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아니 위스키는 먹고 죽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론 순미술은 더 이상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글을 쓰면 그나마 좀 기분이 났다. 생각해 보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할 줄 누가 알았겠나. 대학 시절엔 리포트 한 장, 작가 노트 300자도 못 써서 도망치다 학점 깎아 먹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어설픈 과잉교정 강박에 후배작가들에게 글 잘 쓰라고 핀잔 주고 다닌다. 뭔 꼰부심인지.

플롯만 잔뜩 깔아놓고도 캐릭터가 하나로 뭉치는 것 같아 소설 쓰기를 잠시 내려놓고 에어소파에 누워 이 글을 쓴다. 거의 의식의 흐름 대로 쓰니까 줄줄 나온다. 작년에 한국일보에 단편 투고 하기 전까진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따르면 내 시는 너무 어렵다. 슈퍼 핑계지만 김경주 시인 탓이다. 너무 읽었다. 내 시는 알쓸신잡 같은 지식이 집대성된 치즈 낫또 된장 짬뽕탕 정도이지 않을까. 워낙 죽음에 관심이 많아 글이 너무 무겁고 관념에 갇히기 일쑤였다. 당연히 퇴고는 저 세상 것이었고, 나는 시 하나를 3년 넘게 고치는 바보 중에 상-바보였다. 내가 시 쓰기에 정말 재주가 없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땐 시가 목숨보다 중했다.

어쨌든 살아 있으니 생활이 바뀌고 장르가 바뀌었다. 김영하 소설가의 말처럼 나를 향한 글은 자기 해방이었다. 나는 가체험과 선험을 뒤섞어 인물 사건 배경을 구성하고 상상한 대로 그것들을 유린했다. 그런 경험은 세상 편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진지충이라 투고 준비를 하다 보니 또 복잡해지고 있다. 이 정도면 지랄도 병이라는 말이 나에겐 맞다.

이런 날이면 반드시 시력 보강을 위해 차가운 햇볕 아래 좀 걷고 눈물 좀 흘려주면서 소주에 순댓국물을 마셔야 한다. 하지만 사무실 근처 순댓국집은 낙원빌딩 옆 전주집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다. 도대체 강남은 광고대행과 부동산 투기 그리고 주식충을 빼면 뱃속에 뭐가 남는지 모를 곳이다. 멋 모르고 맛없는 동네에 사무실 구해 글 쓰고 앉았는 나도 참 한심하다. 지난밤 마신 술이라도 깨려면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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