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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20. 2023

보통의 예술가 3

나무인간 49

본 텍스트는 2018. 10, 27 - 12, 13 사이 진행된 손지훈 개인전 `보통의 미술가`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프로그램 2018, 쇼앤텔(대안공간, 양평동 소재)에 전시된 비평문입니다.


 

억지인간


 사실 저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럽습니다. 자유를 위해 주말도 ‘일’을 하니까요. 공간에 나오면 시설과 장비를 점검하고, 다음 전시를 위한 작가미팅을 하고, 운영자금을 조달할 궁리에 관련 지원부처의 웹을 부지런히 기웃거립니다. 공간 밖에선 서로 지구 정반대 편에 서 있을 법한 저와 아버지의 관계를 제하고- 라도 다른 가족들에게 제가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일원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쪼갤 수 없는 원자를 쪼개듯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가까스로 지금 작업과 미래의 자신을 고민합니다. 동시에 연애활동까지 하니, ‘아, 이것은 정녕 위대한 철학가 하이데거와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설명해 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닐까요?’ 요지는 ‘현존재’(Dasein, 하이데거)인 척 모든 걸 무리하여 기어코 해내는 제가- 정작 자신으로부터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멀어진 참 한심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란 세계는 절대로 예술행위를 포기하거나 멈출 수 없습니다. 언뜻 강직한 집안의 장손으로 얌전히 포장된 자신을 돌볼 안식은 미술과 음악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이유로 안녕을 위해 오롯한 꿈을 짓습니다. 아버지가 결코 구축할 수 없는 판타지 속- 현실의 그 남자를 성당의 아버지로 대체합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 환상을 완성하기 위해 성당에도 취미를 붙입니다. 그러면 비로써 그 얄팍한 금박 포장으로부터 벗어나 성에서 완벽히 창조된 저는, 공간으로 돌아와 수집된 판타지를 하나둘씩 현실로 조립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상된 반영(reflection)을 설명하려 촌스럽게 ‘제 정체성이란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부정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뻔한- 토도 달지 않을 작정입니다. 항상 독립적이어야 할 저로부터 오로지 스스로 어르기만 바랄 뿐, 다른 건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지났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즐기지 않습니다. 단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도 저처럼 가족에게조차 허락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을 원하지 않던가요? 핑계 같지만, 저도 남들처럼 유일한 사물과 장소를 가지려 어린 시절 그토록 방황을 일삼았던 겁니다. 여러분은 한 번쯤 그런 바람이 없었는지요. 현실가족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또 인간사회가 지독히 잔인하고 비열해서 예술세계로 달음박질치고 싶던- 간절함 말이지요. 돌이켜 보건대 저는 평생 그랬던 것입니다.

 달음박질이라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 기꺼이 뛰어들었다-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 당시 저란 아이는 장난감과 놀고 만화책을 읽는-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아들 역할이었습니다. 그렇게 메서드 연기를 하고 나면 보상으로 바라던 볼트론과 만화책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만질 수 없는 제게만 주어질 장난감들이- 다행히 이런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리처드 도킨스)에게도 아주 따뜻하고 헌신적인 모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머리가 크고 차츰 독립의 의지가 강해지니 응당 그것마저 제 벌이로 해내기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그 바쁜 와중에 억지웃음까지 익히고 맙니다. ‘그래, 유리창 너머로 웃어주자.’ 이런 마음이었다, 랄까요. 여전히 ‘사회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드디어 제 모습은 투명한 미소로 웃고 있는 저 유리 수납장과 같습니다. 마치 밖에서도 안이 훤히 보이는- 삶을 버틴 결과입니다. 이 얼마나 예술가로서 구해야 할 생(生)을 향한 생(生)의 정연한 태도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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