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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22. 2023

한강의 글

나무인간 51

2019. 5, 2 - 5, 12 진행된 175 기획공모 선정, 갤러리 175 ( 안국동 소재) '한강의 ' 전시된 텍스트입니다.



한강의 글           

    

 삶은 중간이다. 하나의 나가버린 것과 지나가는 것 간의 관계이고,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죽은 연결이다. 모든 것이 꿈이기에, 간단하기만 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꿈을 꾸라는 명령을 내리고, 종종 내 안에는 한 명의 학자를 불러놓고, 깐깐한 태도로 논쟁을 벌인다. 무엇인가 항의하듯 축축하고 끈질긴, 질료적 투쟁은 오직 꿈이다. 혹은 지성의 추론과 감성적 동기에 대해 아는 바 없는 순수한 양자의 결합이다. 그 사이 하인으로 변신한 나의 경계가 감금당한 주인의 딸에게, 그녀의 창문 아래서 어슴푸레 구애를 한다. 그녀의 영혼은 나의 집이고 나의 환영이다. 그것은 있음 혹은 없음에 속하는데, 죽음이 그렇다.     


 동이 트면 목적지가 불분명한 터널 너머 술과 낭만이 정착한 곳에 옛 도시들이 하나둘 자리를 폈다. 동이 비친 웅장한 석벽에는 알려지지 않은 전통이 적혀 있었다. 범람한 초원 위 영롱하게 반짝이는 야경이 서성이고, 여의도 구석에 버려진 돗자리에서 그녀의 첫사랑이 썩어가고, 흉측한 산책을 가리키는 벚꽃 향 사이, 지도에서 사라진 수영장이 젖어있었다. 해뜨기 직전 길고 좁은 대기 속 자전거들이 헤엄치고, 자물쇠가 가라앉은 오래된 우물터에서 눅눅한 망령들이 모락거리고, 볼품없는 비린내가 강바닥을 가리키던 1980년 10월의 여느 날이었다.     


 하루는 시민공원에서 투신한 썩은 쓰레기 몇이 뚝섬까지 거슬러 흘러들었다. 그 옆에 누가 버린 비닐 같은, 인식이 박제된 낡아버린 운동화와 터진 농구공이 떠 있었다. 그녀가 인류를 위해 건축한 것은 대지의 냉정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문득 없던 백사장이 반포에 깔리자 가짜 모래들이 결빙되었다. 그녀가 후대에게 남긴 장면은, 매우 그녀 자신이거나 혹 그녀의 시대가 아로새겨진 탓에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했다. 그날 새벽, 하류에서 상류까지 빙산이 밀려와 캠핑하던 괴물들이 편의점과 함께 남산으로 떠밀려갔다. 후에 멀리 오리 배에선 오줌 같은 것이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이 미끄덩한 사건이 나들목 부근까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제복 입은 조형물을 여의나루 벤치 주변부터 둔치까지 설치했다. 화면 속 앵커는 깊은 잠에 들었고, 배경을 보러 나온 구경꾼들이 봄나들이에 여념이 없었고, 인공겨울에 가려진 어느 낙하운동은 끝내 보도되지 않았다.

     

 그녀는 달의 길을 따라 내달린다. 노력은 허무하다. 그래도 기분 전환이 된다. 사실 그녀의 생은 무척 곤해, 단 한 권의 나무도 되지 못하고 가난한 뿌리로 남았다. 그녀의 책은 한 줄 건너뛰지 않고 단숨에 읽힌 적도 없다. 자신의 줄기를 찾고 있지만, 한강 어디에도 그녀의 숨을 건넬 곳은 없다. 그녀는 언뜻 쓰러졌지만 조용히 가파른 호흡을 뱉는 거대한 검은 말처럼, 검질기게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다. 보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추락한 위성처럼 한강 수면에 떠 있던 밤, 자전거는 고장 난 자신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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