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인간 Jul 23. 2023

한강의 글(수필가의 말)

나무인간 52

2019. 5, 2 - 5, 12 진행된 175 기획공모 선정, 갤러리 175 (구 안국동 소재) '한강의 글'에 전시된 텍스트입니다.



한강의 글           

    

1. 한강의 글     


 이 글은 강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저는 들리지 않는 의미들을 전달받았습니다. 저기 널찍하게 가로누운 침묵- 저는 그것을 어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죽어가는 자식들 옆에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적이 없기에 궁금했습니다. 상상하길, 어쩌면 그녀는 평생 자식을 품지 않은 척하고 피부에 그녀의 자식들을 몰래 새겨 놓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강 위와 옆에 살지만 밑을 모릅니다. 볼 수 없으니 관찰할 수 없고, 깔려 있는 문장들도 읽을 수 없으니 분명 그 아래가 인간의 희곡은 아닐 겁니다. 그녀는 인격이 없어 어떠한 관점의 방벽도 없습니다. 공간을 문제화시켜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벽 앞에서 매일 스스로를 재단합니다. 또 강은 시간의 품격을 요구할 뿐, 인간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잉태한 인칭에게 간섭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함구하는 동안 자식은 오로지 단정한 어머니를 향해 각자의 하소연에 여념이 없을 뿐, 자신들 역시 풍경화 속 상(image)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2. 사마리아인의 집     


 그곳은 도시에서 자란 시골이고, 질량이 부피에 따라 변하지 않는 헛웃음입니다. 가변의 중력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자신이 창조한 곳으로부터 스스로 쫓겨나야만 합니다. 이는 가족의 요청에 의해 명령된 있음과 없음의 수련입니다. 공허한 생의 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버려진 아이를 하나둘 그 품에 안고 과정의 끝으로 떠나는, 자신의 자식을 사물처럼 부패시키는 삶은 비장한 분리입니다. 그녀는 실재를 드러낼 가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의미라는 야단은 부려야 할 미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그토록 욕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그녀가 자청한 일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밝힐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내 보이려는 건, 없는 길로 순례자들의 행렬을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향한 이런 안내는 먹지 않고, 잠들지 않고,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신의 영토로부터 추방당한 부당함을 자각하려는 디아스포라의 최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가려 레테의 강물을 고민하고, 또 파우스트가 메피스토로 인해 자신의 부재를 걱정해야만 했듯이, 이유를 갈등하지 않는 까닭은 불안정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도덕은 오늘도 어김없이 집에서 제 홀로 죽어가는 이름 없는 자식 앞에서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호출할 수 없는 존재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움- 바로 소문 없는 유랑입니다.          



3. 그리고 물에 무언가 남았다     


 자살, 모두가 피하고 싶은 이야깁니다. 인간의 전통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일입니다. 미디어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언론을 통해 구성되기에, 상상력이 지나치게 동원된 소설처럼 독자를 불편하게 합니다. 죽음이 바로 저기 놓여 있었음에도, 미완의 참담함이 너무 흔해진 시절 탓인지 사람들은 보도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수취불명의 이야기들이 강에 가라앉습니다. 시시콜콜한 여기와 멀어집니다.

 자식들 누구나 가장 가까이 그것을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극이 아닌 탓에 외면합니다. 어머니가 다 해결해 주시리라- 는 윤리적 태연으로 귀를 도려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자신으로부터 창조된 추락이고, 힘없는 목격자입니다. 개입할 수 없는 순간들이 그녀를 강제하면, 어머니는 마주 볼 수 없는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위치시킵니다. 그래서 소식이 닿지 않으면, 검고 희미한 발언들이 사라진 그녀의 시간 주변에 쌓입니다. 마치 젓이 멈춘 어미 늑대 주변을 서성이며 자라지 않는 새끼처럼, 무성한 농담들이 쇠약한 어머니를 끊임없이 핥습니다.          



- 수필가의 말     


 죽음이라는 고리타분한 운동이야말로 오직 인간의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다시 죽음을 거부합니다. 오래전 가라앉은 왕들이 하룻날 불쑥 떠오르듯, 흡사 어제를 기억 못 해도 살아있는 무엇처럼 “아, 새로운 사실이 물 위에 떠올랐군.”이라며 술렁거립니다. 자연적 죽음 너머로 또 철학자들은 걸어갑니다. 과거와 달리 숭고미 없는 완강하고 내밀한 시선으로 죽음의 미래를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이타성(alterity)의 유의미를 복기하자면, 필수적 사건들의 연속성에서 산 자들의 언어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기록하는 도구인 선의지(ein guter Wille)는 자연의 법칙, 즉 모든 어머니의 규율에 어긋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한강은 그 시간의 중간으로부터 흘러옵니다.

작가의 이전글 한강의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