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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6. 2023

눈치 없는 인간

나무인간 37

2023년 2월 24일


도예가는 갤러리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나 찾아왔다. 그는 LED조명 아래 기획서 쓰는 나를 발견하고 잠긴 문을 여러 차례 흔들었다. 순간 나는 언짢지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됐다. 도예가는 서툴렀다. 레퍼토리와 눈빛은 진부했다. 상황이 익숙한 그의 아내는 조용히 별 볼 일 없는 대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도자-회화 작가라고 소개했고 대학에서 미술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과 고등학생 시절 우울증을 앓아 자살 기도를 했다는 고백을 반복했다. 더불어 동양의 정신이 서양의 언어로 해석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까지 토로했는데, 그 모든 것이 내게 흔한 일이기에 그로부터 어떤 단단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해묵은 관념조차 풀어내지 못하는 그의 관사와 관용구는 따분했다. 텅 빈 미술관에 울리는 메아리. 심지어 나는 그가 스스로도 규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역사를 왜 타인에게 설득하려는지 의아했다. 평생 가마와 흙을 만진 손으로 모든 사물의 온도를 재려는 태도가 고리타분해 보였다. 와중에 2미터 거리에서 출발한 서로의 기시감은 미시감으로 변했다. 나는 완전히 집중력을 잃었다. 당장 집에 돌아갈 시간과 다음날 출근 걱정에 마감이 코앞인 기획서 작성은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다리가 아팠지만 그나마 앉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자정을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와 눈 맞춤을 피해 조금씩 산만하게 굴었다. 그리고 허리를 꺾으려 뒤돌다 테이블 주변에 서 있는 그의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때마침 그녀가 모바일을 만지고 있었다.

 “실례지만 지금 몇 시쯤일까요?” 나는 물었다. “9시 10분이에요.” 그녀가 답했다. "아, 벌써…" 나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제야 진지하고 눈치 없는 도예가의 입에서도 그만 집에 가야겠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메아리가 사라졌다. 나의 기민한 연기 덕분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낸 동기가 떠올랐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그는 창작의 고통과 자기 연민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특별한 장르로 여겼다. 내가 도예가에게 느낀 익숙함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사동에서 근무할 당시 그와 닮은 예술가를 많이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지한 눈빛을 가졌고 눈치가 없고 말솜씨가 서툴다. 그런 밋밋함 때문에 나의 자전축이 흔들리는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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