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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를 수집하는 소녀

너는 어디에 가닿고 싶었을까

by 조은영 GoodSpirit

화요일은 오롯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비워둔 날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낮동안 홀로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지네요. 브런치북 <배고픈 달>의 새글 발행을 건너뛰어볼까도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발행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니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면서요. 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해서 자리에 앉습니다. 오전에 충분히 게으름을 피웠으니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도 있고요. 오늘 발행글은 평소와 문체가 조금 바뀌고 짧은 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소녀는 한때 기념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성탄절기에 발행되는 크리스마스 씰도 학교에 미리 신청해서 때맞춰 받으면 우표와 함께 작은 파일에 꽂아 보관했습니다. 여러 기념일마다 다양한 종류의 기념우표가 발행되었지만 전통적이거나 자연물을 소재로 한 것이 좋았습니다.

우표와 씰은 어린 소녀에게 또 하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주제에 맞게 완벽하게 디자인되어 발행되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자리, 남해바다의 신비, 멸종위기 및 보호야생동식물, 우리나라의 철새와 텃새 등이 아름다운 형태와 빛으로 형상화되어 틀 안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틀 안에 있는 그대로 가둬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소녀가 수집한 우표와 씰은 수집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거든요. 이들의 본래 쓰임은 어딘가에 닿는 것이니 그 쓰임을 다하도록 돕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소녀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소포를 보낼 때 수집한 우표를 붙였습니다. 보통 우편물에 붙이는 일반우표는 금액별로 그림이 정해져 있어서 편지에 매번 똑같은 우표를 붙이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거든요. 심지어 외국에 보내는 소포에 수십 개의 다른 그림의 우표를 붙인 적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절기에는 씰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씰은 특별히 더 아름답게 느껴졌지요. 소녀의 조금은 다른 마음을 봉투에 전시하여 어디로든 닿게 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습니다.

소녀에게 우표는 그곳이 어디라도 목적지를 명확하게 정하여 적기만 한다면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였으니까요. 어디로든 떠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어린 소녀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우표가 부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있으면 어떤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아직 닿고 싶은 목적지를 몰랐던 소녀는 어디로든 가닿을 수 있는 우표를 수집하여 하나 둘 떠나보내면서 자신의 떠날 날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소녀가 닿고 싶었던 곳이었을까요. 소녀는 생각합니다.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라고 어른이 된 소녀는 생각하면서도 다시 어딘가에 닿을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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