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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

쓰임이 달라질 때

by 조은영 GoodSpirit

나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을 술이라고 생각한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술에 취한 인간은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어떤 실수들은 단순히 실수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후회와 상처를 남긴다. 술은 많은 것을 허비하고 파괴하고 그렇게 술은 그 취한 자 역시 파괴해 버린다. 과하지 않은 '적당한 술'은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어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적당한 술보다 '적당한 관심과 예의, 그리고 진심'이 분위기를 더 무르익게 만든다. 술은 별 노력 없이 그것들을 간편하게 대체하는 싸구려 일회용품일 뿐이며 부작용이 적잖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쓰임이 달라지면 얘기가 다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답게 집에서도 혼술을 자주 했다. 술에 취하면 아무 때나 잠이 들었는데 채 마시지 못한 술이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남긴 술을 요리에 사용하곤 했다. 소주는 고기의 잡내를 없애는데 썼고 막걸리로는 술빵을 만들었다. 술빵.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술이 그토록 고소한 빵이 된다는 게 놀라웠다. 아버지를 인사불성이 되게 만들었던 술의 쓰임이 달라질 때 나는 짧은 행복을 음미할 수 있었다.

술빵의 레시피는 모른다. 어릴 적 엄마가 술빵을 만들 때 옆에서 지켜본 기억만이 설핏 난다. 밀가루와 발효술인 막걸리를 섞어 반죽을 치대어 놓은 바가지에 비닐을 씌워 따뜻한 곳에 두면 반죽은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부풀어 오른 반죽을 손가락으로 푹 찔러보면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엄마는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반죽을 넓게 펴서 담고 약한 불에 천천히 구웠다. 바닥이 호떡처럼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면 뒤집어서 반대쪽도 바삭하게 구워지길 기다렸다. 다 구워진 술빵을 도마에 올려놓고 한 김 식히고 식칼로 쓱쓱 썰어주셨다. 빵 속에서는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구수한 빵 냄새가 코를 파고들 때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겉바속촉,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술빵을 나는 겉부터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어린 나의 기준에서 무용한 것이 유용한 것이 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모든 유용과 무용은 결국 한 끗 차이지 않을까. 욕망과 절망, 선과 악처럼 정반대인 것 같지만 하나에서 출발한다.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가까우면서 먼 것이다. 음식의 재료나 물건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유의미한 무엇이 되기를 우리는 바라고 또 바란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언제나 쓰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일부 사람이 지닌 특별한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재료를 어떻게 쓸지를 스스로 고민해 볼 때 우리는 누구나 유용하며 이로운 쓸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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