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 편의점에는 내가 아는 형이 일한다. 나는 그에게 별로 빚진 게 없지만, 어쨌든 그는 나에게 1930년대의 음악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다. 이 형은 주말 야간에만 근무하는데, 그때마다 늘 영어 단어장과 토트넘 경기를 켜둔 채 이역만리에 사는 여자친구에게 영어로 알 보울리와 루디 발리에 대해 설교를 한다. 물론 나에게도 그 두 사람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거나 주말 새벽에 귀가할 일이 생긴다면 꼭 편의점에 들르는데 30년대 음악을 좋아하는 특이한 음악 취향의 소유자가 지키는 시간대답게 언제나 요상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번화가가 아닌 주말 새벽의 편의점에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다. 외국에 사는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는 편의점 알바가 본인의 9살 아이의 송곳니처럼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음악을 통해 그 공간에 투영시켜도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나는 편의점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카운터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 우리 가족이 꽤 오래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편의점 사장님과 아는 사이기도 하고, 이 형도 의외로 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거기 앉아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내 자리는 보통 컴퓨터 앞이기 때문에 이 형이 틀어둔 그날의 정신세계(플레이 리스트)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데 보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멀리 떨어진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는 그의 불안정한 마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다들 짐작했겠지만 그는 썩 순탄하지 못한 연애를 하는 중이다.
내가 그날의 DJ가 된다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준다는 이유로 빠른 bpm과 오버드라이브가 세게 걸린 음악을 틀어준다. 그렇지만 이 형은 치명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결함이 있는데, 엇박의 음악을 들으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증상이 비슷한 복통을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하게 선곡을 해야 한다. 일단 비틀즈와 라디오헤드 그리고 도어즈를 들었을 때는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 스트러머를 따라 라이더 자켓(루이스 레더는 아니지만 70년대 영국에서 생산되었다)을 사서 기분이 좋았던 어느 날도 편의점에 들렀다. 그날도 그는 언제나처럼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며 터키 음악을 틀어놓았다. 가본 적도 없는 터키를 그리워하는 형의 마음보다 내 기분이 훨씬 소중했기 때문에 당장 자리를 점거하고 더 클래시의 음악을 틀어놓았다. 편의점에서 이스탄불을 지우고 런던을 알리고 싶었다.
가만히 그 음악을 듣던 형이 한마디 뱉었다. “그 당시 기성세대들이 느꼈을 불쾌함을 알겠다”.
그렇다 이제는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어버렸지만, 펑크는 당시의 기성세대들을 향한 저항이자 도전 정신이 담겨있는 음악이다. 지금이야 엄마, 할아버지, 선생님 등등 모두가 즐기는 비틀즈의 음악도 그랬다. 대중문화를 가르치는 교양 수업에서 말하기를 비틀즈는 당시 10대들의 성해방 운동에 크게 일조했다고 했다. 내 자식이 더벅머리 남자들의 음악을 듣더니 섹스를 하러 가겠다고 한다면 좋아할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루프탑 콘서트만 봐도 그렇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미화돼서(사실 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피터 잭슨이 복원한 그들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눈물이 나오지만, 그 당시에 근무를 하고 집에 와서 잠을 청하려던 주말 야간 편의점 알바가 있었다면 그는 지붕 위에서 쏟아지는 비틀즈의 향연에 마크 채프먼보다 10년 정도 일찍 권총을 집어 들고 싶었을 것이다.
펑크 음악은 저항 정신을 편안하게 옮겨주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마음만 먹는다면 3분 안에 담긴 그들의 외침을 편의점에 앉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세대와 아무런 시공간적 관련이 없는 나는 편안하게 올라타 즐기고 내려왔다. 그런데 기성세대의 거부감이 함께 탑승했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1930년대 영미권과 터키의 아라베스크적 취향을 간직한 그는 이미 무덤에 묻혀 있는 구세대들의 대변인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클래시의 음악이 끝나자 형은 다시 알 보울리의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였다. 순순히 틀어주었다. 더 클래시는 30년대에 저항하였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