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산 빈티지 리바이스가 불러 일으킨 상상
일본에서 시작된 빈티지 리바이스 열풍은 요즘 국내에서도 따갑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가 꽤나 합리적인 가격선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은 90년대에 제작된 미국산 리바이스다. 이름 좀 있다는 빈티지 샵이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그것이다(소비자 입장에서 이래저래 구경하기 어렵지 않은 바지이지만, 판매하는 입장에서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옷은 또 아니다). 인기도 많고 또 가치도 있는 옷이지만, 소비자도 판매자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올라버렸다.
그렇다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바지가 겪어온 시간에 가치를 매긴다면 90년에 나온 모든 것들이 인정받아야 할 것이고, 희소성을 논하기에는 리바이스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청바지이다. 빈티지 마니아들이 흔히 따지는 생산 방식은 체감하기 굉장히 힘든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옷장 속 바지의 대부분은 90년대 생산된 미국산 빈티지 리바이스였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바지이자 분명 만족도가 높은 바지임은 분명하다.
어느 날 소비자와 판매자를 오가던 중 영국산 빈티지 리바이스를 입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년도에 태어난 이 바지가 브릿팝의 황금기를 피부로 겪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국산 리바이스와 비교했을 때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업에서 하나의 매뉴얼로 같은 년도에 제작된 옷이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르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차이점은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영국산 리바이스 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것의 과거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청바지 브랜드의 바지가 영국에서 생산된다면 필연적으로 영국에 사는 누군가가 사갈 것이다. 그리고 이 바지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문화와 함께 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 문화의 흐름 속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바지를 애용하는 만큼이나 자연스레 전주인의 생활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의 생활을 이곳저곳 난 데미지들로 추측해보자면 양반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련의 상상을 거쳐 나는 이 바지가 시적인 분노를 간직한 청량한 펑크 밴드,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줄여서 MSP)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MSP는 전통적인 락앤롤의 범주와 사운드에서 펑크를 섞은 듯한 사운드로 시작해 대중적인 멜로디의 음악으로 탈바꿈한 전형적인 브릿팝 밴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밴드인 것이다. 하지만 MSP는 평범함 속에 타고난 반골 기질을 녹여낸 밴드이다. 평범한 펜타토닉 스케일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곡의 솔로를 연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세상의 어두운 면을 노래하는 밴드이다. MSP는 리바이스 청바지처럼 대중적인 외형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 내면은 굉장히 자해적이다. 그렇게 MSP는 90년대 영국의 유스 컬처를 대변하는 밴드가 되었다. 당시 서브 컬처 씬에 몸을 담던 젊은이들의 리바이스 청바지처럼.
누가 보면 평범한 청바지에 너무 궁상을 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빈티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똑같은 90년대 아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청바지는 나한테 청량한 상상을 보여주었다. 30년도 더 낡은 청바지 안의 자그마한 종이에 적힌 MADE IN U.K는 내가 노래를 들으며 늘 상상하던 판타지를 겪었을 것이니까. 늘 입는 옷에 이렇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은 빈티지를 입을 때만 가능한 상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빈티지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관심을 가져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옷이 간직한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라도 하면 점점 비싸지는 90년대 리바이스가 더 괜찮아 보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