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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Nov 13. 2021

독수리4남매

죽는 일상의 기록(6)

지금껏 거의 석  동안, 병원에서 첫  입원25일의 두번째 입원 동안, 그리고 또 집에 와서도 우리는 단 한번도 엄마를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았다. 

보호자 1인이 무조건 상주해야 한다는 내과 병동에서도 그렇고 퇴원 후, 집에서도 엄마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해서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 사남매 넷이서 요리조리 시간을 짜맞추어서 어떻게든 엄마  지다.

만약을 대비해서 나라에서 지원해준다는 중증환자 간병인도 신청 해 두기는 했지만 아직 이용해 보지는 않았다.

간병의 시간이 3개월이 6개월이 되고, 다시 6개월이 1년이 지도 모는 기약없는 시간들이 된다면 생업들이 있고 각자의 딸린 식구들이 있는 우리들인지라 그때는 어찌 달라질 지는 모르겠지

, 아직까지 우리는 다른 이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엄마 곁을 지킬 여력이 되었다. 가 조금만 부지런 떨고 바삐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

한 일이 여기며 모두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가끔 병실에서 다른 간병인들이 힘들지 않냐고 간병인쓰시라고 명함을 주거나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이 고생들을 하시나하는 쨘한 눈빛을 보내면 언니들은 발끈했다. 각들없이 보내는 의미없는 눈빛 하나에도 상처받을 만큼 예민한 병원생활들이었지만 견딜만 했다. 엄마를 지키는 일이니까. 오려 아파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이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지, 몸이 힘든 것은 암씨롱도 안했다.

누가 우리들에게 쨘한 눈빛을 보내거나말거나 나는 엄마가 반나절을, 안그래도 가만히만 있어도 아프고 불편하고 답답할 환자신세인 엄마가, 우리들이 아닌 다른, 조금이라도 편치않은 누군가와 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둘이 똑같이 까칠하고 쎈 성격들이어가끔씩 잘 부딪치는 작은언니랑 엄마가 서로 툴툴거리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엄마가 스트레스 받아 있을까 봐, 하던 일도 후딱 마무리짓고 재빨리 병원으로 뛰어가고 싶어 졌다. 래서 처음에는 30분이 걸리던 우리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를 일주일만에 20분 안쪽으로 끊어 도착가능한 경로까지 파악해두었다.


요즘에 엄마가 정서적으로 제일 편 하는 것은 나, 막내였다. 육체적으로는 큰언니가 젤 편한 듯 했다. 기저귀에 적응을 못 해 며칠을 변을 못 봐서 다같이 걱정다가도 큰언니만 오면 쾌변을 보는 엄마를 보면서 아무래도 맏이가 그런 쪽으로는 젤 맘이 편한가 보다 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애교있는 투정을 부리며 특히, 아플 때는 오빠에게 의지했고 또 오빠는 힘쓰는 일을, 가령 침대시트를 갈거나 아침마다 엄마체중을 재기 위해 일으켜 세우는 일 등등 힘쓰는 일을 담당했다. 침대시트 정리는 간호사

게 부탁하면 해준다고 잔소리하며 오빠를 말려도 오빠는 엄마가 진짜 아플 때 간호사 따라다니며 귀찮게하고 병의 차도나 링겔, 먹는 약, 식사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 몹시 꼬치꼬치 따지는 본인을 간호사들이 힘들어한다고 런 힘쓰는 일은 스스로 하겠다고 했다.

엄마의 모든 회계를 당하는 작은언니는 자잘하게 병원비 걱정서부터 엄마  관리비, 공과금 납부같은 실무를 부탁하고 맡기곤 했다.


때로는 우리들도 가정과 생업의 일엄마의  겹쳐 지치고 힘들 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최대한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각자 규모의 살림을 살게 되면서 거의 이십  년가량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엄마와 단 둘만의 시간을 이리 길게 가져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돌이켜봐도 없었다.

간만에 엄마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깊이 패인 엄마굴의 주름 헤집어 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보면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있을 수 있는 시간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번은 어느 늦은 밤에 내가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에 보영이엄마가 조용히 엄마곁에 와서 귀에 대고 머라머라며 속닥속닥 얘기를 가길래

"저 할매, 머래?" 하고, 혹시나 엄마에게 무슨 언짢은 소리라도 했을까 소리추어서 가만히 물어보았더니,

엄마보러 우째 인생을 아 왔는 지, 세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식복 하나는 참 부럽다고,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  모두 다 하나같이 어찌저리 엄마 병원을 매일같이 오냐고 진심으로 부럽다고 하고 가더란다. 

엄마가 흡족해하며 그 얘기를 전하는데, 나는 사실은,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보영이 엄마는 절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엄마는 그저 삶의 목적과 이유가 그냥 우리들이었고,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엄마도 그저 우리들만을 위해 살아 왔으니,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온 우리가 그렇게 따라 하고 있을 뿐이다. 

평생을 마치 태양의 주위를 돌고 도는 행성들처럼 우리들을 중심축으로 돌고 도는 인생을 살아 온, 그런 엄마를 보며 자라 온 우리가 이 몇 개월 동안을  엄마 중심으로 돌아 주지를 못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 공전의 기간이 충분치 못 함을 느낄 때마다 이제서야 가슴이 시리게 아픈 우리들 이었다.


물론, 승질도 피고 말썽도 부리며 4남매... 아니 4남매, 우리 모두는 아니라하더라도 나만 봐도 나는 고집쟁이 엄마랑 얼매나 싸웠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귀를 닫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엄마와, 세상이 이래 변해가는데 당신식으로만 살라고 강요하는 엄마랑 그렇게 툭탁거리고 싸워댔다.

 세 하나 살 때,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구입하는 편인 나를, 생필품같은 것은 아예 박스째 쟁여 놓고 써야 하는 엄마는 늘 못마땅해 했다. 또 청소는 걸레질부터 시작해야 하는 나는 청소기만 대충 돌리는 엄마에게 청소를 아예  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사사건건 부딪치는 게 한둘이 아니였지만 엄마는 그 모든 고집과 심술부리는 일상들이 모두 다 우리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안에서만 공전하고 있었다.

요즘같은 때에 자식셋이 키우면서 미련하게도 그 테두리를 절대 벗어지 못 하는 나도,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난 탓에 엄마를 똑같이 그대로 닮아 있었다.


내가 내 인생을 내 자식 셋을 떼어 놓고 생각 할 수가 없듯이 엄마에게도 우리 넷은 그러 했을 것이고 우리집에 의 삼남매가 나없는 일상 상상 못 하듯이 나 또한, 가끔모질게 소리지르고 때때로 상처주는 말을 암치도 않게 내뱉어도 엄마없는 나의 일상은 단 한 순간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넷이 돌아가며 엄마 옆을 지키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다들 우리 독수리 4남매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우리 4남매가 백수이거나 한량인 인생들도 전혀 아니었다. 어찌보면 한보다는 치열하게 일상을 사는 쪽이었다. 가장 한량은 자식들이 다 자라서, 중학생 늦둥이 막내만 돌보면 되는 큰언니가 가장 한량이려나... 한량인 큰언니마저도 집은 구미여서 대구까지 일주일에 서너번씩을 대중교통으로 - 고속도로 운전이 스트레스라고 고속버스며, 기차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닐텐데, 큰언니는 피곤하다거나 힘들다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출, 퇴근을 하며 새벽시간까지 지하 노래방과 1층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작은언니와 오빠는 그나마 코로나덕에 조금 한가한 나날들이었고  역시 고등이 한 명과 초등이 둘, 합이 셋의 자식을 건사하며 조그마한 수학교습소까지 운영 중이었으니... 그나마 자영업자라서 시간의 여유가 조금있달까 정도이지 어느 하나 한가한 인생들은 없 독수리4남매였다.




어릴 적에 큰언니는 동네에서 똘똘하고 야무지기로 소문이 났었다. 공부도 늘 반에서 1등이었고 중학교때는 전교 1등도 하고 모의로 치는 고등입학시험에서 대구에서 몇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졸업식에 학생대표로 상장도 받았단다. 그런 큰언니가 엄마는 늘 자랑거리였지

만 바로 연년생인 여동생과 아래도 또 남동생, 또 막내까지 줄줄이 동생들이 이어져 있는 큰언니를 엄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보냈다.

"경이가 얼매나 야무지고 똑똑하다고. 쟈는 대학교를 안가도 머를 해도 지밥벌이는 할 아다."

하며 고등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식에서도 대표선서를 하며 들어간 큰언니에게 만족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취업에는 실패했지만 큰언니는 지방의 국립대 행정직원으로 일했고, 그 지역에서 형부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대학교에서 일했다. 맏이로 포기 당했던 대학 진학이었지만 대학교로 매일 출근할 수 있었다.


엄마는 큰언니 대신에 우리 사남매 중에 유일하게 공부와는 거리가 먼 작은언니를 대학교에 꼭 보내리라 작정을 했다. 헌데 중학교에서도 500여 명 중에 489등을 하던 작은언니를 인문계고등학교

에 원서를 쓴다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단다. 내가 학교를 다닐때에도 우리반 50명 중에 25등까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를 내주고 입학시험을 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7년 전인 언니때에 489등을 일반고에 원서를 내주는 일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학교선생님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이겨버려서 그 일을 해냈다. 고등학교에 떨어지면 재수를 시키든지, 공장에 취직을 시키든지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학교에서 큰소리쳐 놓고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식해서 그랬지, 머." 하고 엄마는 자식 일에는 무식할 정도로 용감해지드라고 했다.


당연히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친척들도 심지어 작은언니 본인조차도 떨어질 거라 믿었는데

작은언니는 고입 연합고사에 떡하니 붙어서 전교 489등이 인문계를 가는, 그것도 뺑뺑이빨로 현재까지도 우리 지역에서 자사고로 가장 명문으로 알려진 여자고등학교에 당당히 입학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이고야, 원서는 써났제, 고등학교를 떨어지면 진짜 우짜노, 실업계 학교도 다 마감되었다카든데, 내 솔직히 진이 연합고사 쳐놓고 잠이 안오드라. 그래도 쟈가 공부는 모해도 시험 운빨이 좋아가 왠지 될 거같드라고." 하며 엄마는 전교 489등의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 신화의 무용담을 주변에 수시로 자랑했다.


그렇게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당연히 작은언니는 학교운동선수 둘을 빼놓고, 뒤에서 3, 4등을 치열하게 다투며 가방에 필기도구대신 드라이기와 스프레이, 화장품을 채워 다녔고, 그 시절에 파마를 하고 다녀도 아무도 혼을 내지 않았다했다. 그덕에 집 앞에는 늘 인근 고등학교에 남학생들이 서너명씩 몰려와 편지나 선물같은 거를 초등학생인 내 손에 쥐켜주며 언니한테 전해 주라했고, 재수없게 엄마한테 걸리는 날에는 빗자루 몽디를 피하고 거친 고함소리와 쌍욕을 들으며 쫓겨나곤 했다.


3년을 전교 꼴찌로 살면서 기죽지 않고 4년제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가던 날, 엄마는 작은언니에게 그 시절에 20만원하는 가죽잠바를 사입히고 비싼 콘택트렌즈를 맞춰대구에서 구미까지 택시를 대절해서 대학시험을 치러 갔다.

국립대가 된 지 얼마 안 된 구미의 공대 토목공학과를 지원한 작은언니는 시험을 치는데 여자는 혼자뿐이어서 쉬는 시간마다 수험생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단다. 시험을 치루는 작은언니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엄마도, 대기를 하던 다른 학부모들이,

"키크고 머리 빠마를 한 야시같은 여자아 하나가 가죽잠바를 입고 여 시험을 치러 왔단다. 으미.. 근데 가가 저거학교 전교 꼴찌라카데. 아이구야, 우리 아들래미 집중 안 되구러. 그런아가 머하러 시험을 치러왔다노." 라며 재수없다하는 소리를 조용히 들어내고 있었단다.

시험끝나고 멀리서 손 흔들며 달려오는 작은언니를 생까며 후딱 어느회사 대구로 퇴근하는 셔틀버

로 올라 타서는 빨리 따라 타라고 손짓하며 그래 창피하드라했다. 그래도 대학시험장에는 들어가 본 작은언니는 대학교에 떨어지자말자 미련도 없다며 백화점에 취직했고 그 후에 작은 언니의 전공을 살려 화장품회사에서 10년넘게 일다.

(나중에 왜 자기만 공부를 못했냐고 불평하던 작은 언니에게 우리들이 해준 이야기지만, 우리 사남매 중에 엄마가 직접 대학시험장에 따라 간 자식은 작은 언니뿐이었다. 재수를 한 4대 독자 오빠도, 늦둥이 막내딸인 나도 시험 날 아침에 집 앞까지도 따라나오지 않은 엄마였다. 엄마에게 작은언니는 그쪽으로는 아픈 손가락이었거든. )



두 언니들에 비하면 오빠와 나는 무던하게 1등도 아니고 꼴찌도 아닌, 잘해서 튀지도 않고 못해서 튀지도 않는 평범한 학창시설을 보냈다.

두 언니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긴 여유로 문화적 혜택도 조금씩 누렸고 아빠도 그 시절에는 자잘한 돈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오빠는 평범하게 안정적으로 수성구에서도 나름 상위권의 고등시절을 보냈지만 사립대를 가고싶은 오빠를 엄마는 등록금이 비싸다고 작은언니가 떨어진 지방의 국립공대에 시험치게 했다. 오빠는 진짜 그 학교가 가기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반항을 하고 엇나가기로 작정하고 마지막 답안지를 쭈욱 한 줄로 그어버렸

단다. 여유있게 합격하리라 믿었던 엄마는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재수시절을 학원보다는 당구장

으로 잡으러 다니는 일이 많았던 오빠는 재수다운 재수준비는 안했지만, 이듬 해에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바뀐 첫 해의 혼란함을 틈타 어느 4년제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방황을 멈추었다.

나름 공부하던 가닥이 있었던건지, 오빠는 처음의 목표치보다는 낮아진 학교라 그런지, 줄곧 장학금을 받으며 금세 적응했고 교수들 눈에도 들 되어 졸업과 동시에 오빠는 지방의 이름모를, 지잡대 출신임에 불구하고 서울로 취직했다. IMF시절이라 있는 사람도 다 짤리는 시절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의 어느 환경연구소에 취직한 오빠를 다들 대견하다 했다. 그때부터 오빠는 딱 14년간,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울사람으로 살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해에 오빠는 어설프고 힘들기만 했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그런 용기를 낸 것도 사실은 혼자가 된 엄마 때문이기도 했다.


오빠의 방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본 덕분에 나는 무조건 재수는 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바라기만하고 택도 없었던 in서울은 포기하고, 집안 살림 걱정을 덜어보자는 이유로 등록금이 싸고 장학금도 많이 준다는 우리지역 최고의 국립대에 대충 입학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치열한 교육열때문에 우리 사남매는 수성학군 옆 동네로 이사와서 살았고, 전 동네에서는 평범하다 생각했던 나의 집안과 일상들이 변했다. 학교에서 만난 2층 집에 공주침대를 가진 부잣집 친구들을 보며 나는 부유하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집에서 사는데, 가득이나 아이가 많아서 엄마, 아빠가 돈을 그만큼 더 벌어내야하는 그런 고달픈 가정의 막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러고서는 그저 튀지 않고 무던하게 살아가는 게 내 인생에 알맞은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다.




전교 1등인 큰언니는 대학을 포기해야 했고,

전교 꼴찌로 원치 않은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야 했을 작은언니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오빠와 나 또한 나답게, 오빠답게 넘치는 개성을 숨기며 평범한 척하고 살아내느라 부적응자로 자랐을테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들은 자라났고 어른이 되었다.


각자가 원하는 길을 갔던, 못 갔던 우리들은 살아 내었다. 바라는 모습이었든, 아니었든 우리들은 랐다.

그 길에, 그 과정에서 엄마와 아빠는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가끔은 원망하고 이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걸어 온 길였음나는 고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오히려, 나에게 더 최선을 다 하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당신들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나'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책을 보면서 큰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계모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엄마인데, 엄마와 아빠가 자식을 버리려고 계획을 한다는 구절이, 그것도 먹을 것이 없고 돈이 없어서 자식을 버린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고 무서웠다.


어린 시절 내 부모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늘 바쁜 엄마, 아빠여서 우리들은 엄마, 아빠의 따뜻한 보살핌보다는 우리들끼리 서로 많은 것들을 해결하고 알아서 생존을 해야 하는 환경서 자라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길게 얼굴 마주 보며 다정한 일상의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바쁘게 새벽부터 일터에 나서서 저녁 늦게에나 돌아오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어림풋하게나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저렇게 바쁘고 가끔은 치열하게 살면서 세상살이에 힘들 때마다 서로할퀴고 상처주며 싸우는 그 모든 일상들이 우리들, 당신들의 자식 넷을 더 잘 키워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라는 것을.


늦은 밤에 귀가하는 아빠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다리 속에, 자전거를 타고 종일 대구시내를 누비는 엄마의 자전거 뒷칸에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과자 한 봉다리 더 담아 오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던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설명을 듣고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대문을 열어 주러 뛰쳐 나가는 우리들의 신난 모습에, 검은 봉다리를 신이 나게 받아 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우리들을 바라 보는 엄마, 아빠의 눈빛만으로도 설명이 필요 없었다.

어린시절 나는 내가 몹시 가난한 가정의 아이임을 수시로 느끼며 살았을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엄마와 아빠가 있어서 헨젤과 그레텔보다는 참으로 다행인,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새엄마에게 버림받는 공주들에 비하면 가난하지만 버려질 걱정은 1도 하지 않는 내 어린 인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 남편의 등더리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울아빠등더리에서 나던 땀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두 딸의 손바닥과 손등을 비비면 어린 시절에 엄마 거친 을 만지작거리다 잠아침녁에 엄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지락꼼지락거리며 깨어날 때 기분 좋은 느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독수리4남매 (자전거 왼쪽 큰언니, 오른쪽 줄무늬티가 작은언니, 자전거 앞자리에 오빠, 뒷자리 꼬맹이가 막내인 나다. )

잠시 잊고 살았지만, 사진 속의 어 시이나 지금나 우리 넷이 뭉치면 겁날 것이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공간을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는 저 햇살아래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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