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죽과 심심하게 끓인 된장국을 챙겨서 엄마집으로 간다. 아래께 응급실을 다녀오고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단다. 기어이 오늘 아침에는 헛구역질도 해댄단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엄마의 세번째 입원은 성사되지않았다. 세상은 코로나 4차유행이 정점을 찍고 있던지라 중증 말기암환자의 입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별다른 뾰족한 처방이나 치료법이 결정되지않은 채, 단지 기운이 없고 밥을 못먹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입원을 하기도 어려운 일인가보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엄마의 배에 바늘을 찔러 복수를 4.5리터를 빼낸 후, 간암환자에게 완전 좋다는 알부민을 한병 맞춰 달라고 진상을 부려서 맞고 오는게 다였다.
내가 고3이 되던 해에 엄마는 거의 이십 여 년을 해 온 쥬스장사를 그만두었다. 딱히 고3이 된 막내딸의 뒷바라지 때문만은 아니고, 그해 봄에 큰언니의 첫 딸, 엄마의 첫 손주가 태어나기도 했고 또 아빠가 거의 30여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운좋게 그 회사의 사택에 살던 우리는 그 해에 이사를 가야하기도 했고 여러가지로 그쯤에 우리가정에는 복잡다단한 일들이 몰아쳤고 엄마도 이제 오토바이를 타고 쥬스박스를 나를만한 기력의 나이도 아니었다.
아무튼 겸사겸사로 엄마는 내가 알기로는 처음으로 ㅡ 아마도 내가 태어난 이후로 엄마는 처음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전업주부가 된 엄마는 고3인 나에게 이틀에 한 번, 혹은 삼일에 한 번 꼴로 아침마다 녹두죽을 들이밀었다.
아침을 안 먹은지가 한참된지라 아침을 거르는 게 더 익숙한 고3 막내딸이 죽이라도 한술 뜨고 등교하기를 엄마는 이제서야 바랐나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질이 고약할대로 고약하고 날카롭기가 하늘을 찌르는 고3 사춘기 딸ㅡ 사춘기라기엔 19세의 나이가 쫌 머쓱하고, 그냥 고3 히스테리쯤으로 해두자.
아무튼 썽질머리 고약한 고3 히스테리의 막내딸이 그 녹두죽과 물김치를 순순히 목구멍에 넘기는 날이 거의 없는데도 엄마는 일주일에 두 어 번은 녹두죽을 끓였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몹시 기분이 좋은날이거나 몹시 한가한 어느 날에, 서너달 가운데 딱한 두 번쯤이었을 테지, 그런 날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녹두죽을 한 숟가락이라도 떠서 먹고 있으면
"봐라, 봐. 니가 녹두죽을 좋아한다니까, 속이 편하제? 오늘은 하루 죙일 든든할끼다." 하면서 다시 내가 녹두죽을 뜨는 서너달 후에까지 그 얘기를 반복했다.
대외적으로도 나는 녹두죽을 얼마나 잘 먹는 아이로, 녹두죽을 먹고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우리 지역에서 최고로 좋은 국립대를 학원 한번 안가고 과외 한 번 안하고 척~하니 붙은 아이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엄마는 다 녹두죽덕이었다.
목이 까쓰러워서 삼킬수가 없다면서 내가 끓여온 녹두죽을 물리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며 그때가 생각났다.
엄마가 아침마다 끓여다가 끼니보다는 드라이가 먼저인 내 옆구리에 놓아두고 간 녹두죽.
그 녹두죽의그릇숫자만큼 나도 끓이고 물리기를 반복해야 엄마가 내 녹두죽을 쉬이 넘기고, 달게 받아 먹을 수 있을까. 다행히 아직은 내가 녹두죽을 엄마만큼은 끓이지를 않았고, 내 사춘기시절에
"안 먹는다고!"하면서 매정하게 문앞을 나서던 날들만큼은 엄마가 내 녹두죽을 물리지 않았다.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딱, 그만큼만 녹두죽을 끓여보리라 다짐을 해 본다.
엄마가 아침마다 끓인 녹두죽을 먹고 명문대에 척하니 붙은 우리동네 자랑거리였던 막내딸처럼 엄마도 그 막내딸이 끓인 녹두죽을 먹고 이 몹쓸 병을 훌훌 털어 버렸다고 내가 동네에 자랑하러 나설 참이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싶었다. 나와 엄마만의 이야기보다는 아파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준비하는 모든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싶었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차 죽음을 맞이하기보다 죽어가는 과정도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세상살이의 한 부분인 일로 받아 들이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한번은 죽기 마련인데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칠 일들일텐데 호들갑을 떨며 슬픔을 쥐어짜내기보다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그래 요즘 아이들 말대로 쿨하게 이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그게 엄마의 스타일이고 또 내 스타일이고 쿨한 우리 모녀의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나하나 시간을 끄집어내고 하나의 음식에도 이렇게되새김질을 하다보면 절대 객관적이고 담담해질 수가 없다.
단순한 녹두죽 한그릇조차도 그냥 녹두죽이 아니고 이렇게 자꾸 구질구질해진다.
엄마가 끓인 녹두죽만큼 나도 끓여낼터이니 엄마도 먹으며 버티어보라고 또 구질구질해 지는 것이,
이 죽어가는 과정이다.
밥을 먹어야 산다.
혈당이 올라가니 식혜는 그만 먹자.
약은 꼬박꼬박 제때 챙겨먹고
누워 있지만 발목을 까딱까딱, 팔 휘휘 돌리기 운동이라도 해라.
아니면 잡아줄테니 좀 걸어볼래?
손은 수시로 소독티슈로 닦고 양치도 해야 한다.
귀찮아도 머리를 감자...
이런, 매일 반복되는 나의 잔소리들은 지금의 이 모든 순간들이 나에게는 엄마를 살리기위한 과정이라서 하는 잔소리들이다.
살리려고 용을 쓰는 나의 잔소리를 대부분 거부하고 힘들어 하는 애꿎은 엄마를 원망하며 바라보다가
문득, 이 모든 순간들이 살려내야만 하는 시간들인 내 절박한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지금 이 시간들은 과연 어떤 시간들일까.
엄마는 지금 이 순간들이 살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고있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굳이 입밖으로 꺼내 말하거나 혼자 머릿속으로라도 감히 상상해 볼 자신도 없지만...
녹두죽을 물리는 엄마를 내가 말하려는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할 지극히 객관적인 죽음의 잣대로 들여다 보면 사실은...
지금 이 모든과정들이 79세 말기암환자인 엄마의 입장에서는 죽어가고 있는 과정의 시간들인 것이다.
그렇담 나의 이 앙칼진 잔소리들이 과연 무에가 의미가 있나.
얼마가 될지도 모를 이 순간순간들을 그저 감사히 여기고 오롯이 이순간들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추억하고 나누고...
내눈에, 내마음에, 내가슴에, 내머릿속에 깊이 담아야 할 것이 더 많은데,
또 엄마 눈에, 엄마 마음에, 엄마 가슴에, 엄마 머릿속에 하나라도 아쉬움과 깃털같은 미련이 있다면 버리고 정리하고 소중히 담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 나가야 할 시간들인데.
나는 자꼬 엄마를 살리려고만 미련을 떨고 있다.
엄마의 시간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요즘 유행하는 의학 드라마에서 한 의사의 어머니가 자기가 치매인 줄 알고 겁났다고 아들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두려웠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의사인 아들이 그런 어머니에게
"엄마가 매일매일 나를 잊어도 내가 엄마대신에 매일매일 엄마를 기억하고 매일매일 내가 엄마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줄께..." 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어떤모습이건 있는 그대로 그저 당신은 내어머니로 다 받아들이고 아픈모습도 그저 엄마로받아들이겠다는 그 의사의 용기가 부러워서 한참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물론 드라마이긴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그저 엄마를 더 엄마처럼, 원래의 엄마모습 그대로 더 오래 붙들어 잡고 있는데 급급한 내가 부끄러웠다.
하루든 한시간이든 일분, 일초이든, 엄마의 지금의 이 순간들이, 이 견뎌냄의 시간들이 과연 엄마는 행복할까?
엄마의 속내는 편안할까? 가늠도 못하겠다며 엄마의 속내를 그대로 들여다보려고도 안 하고 그저 더 잡아두려고 욕심부리는 내가 과연 엄마를 위해 무얼할 수 있을까?무얼 할 수 있다고 매일을 잔소리로, 들을 여유도 없는 엄마에게 해대며 이 소중한 시간을 의미없이 버리고 있나.
엄마의 마음도 지금, 몹시 바쁠 터이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맑을때, 지금의 엄마를 그저 바라보고그냥 지금 모습을 맘 속에 고이 간직한다.
차근히 엄마가 하고 싶은 것, 아쉬운 일, 기억하고 싶은일... 그런 것을 가늠해보고 엄마의 표정을 보고 말을 들어본다.
과연 엄마의 인생이 엄마는 어떠했기를 바라고 있을지.그것을 알아차리는 것,과연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일들에집중해 본다. 그게 우리들의 몫일 게다.
살리기위한 과정은 희안하게도 살리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서로 더 아프고, 더 상처주고 더 슬퍼진다.
그저 자연스레 죽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덜 상처받고 덜 아플까? 그게 드라마처럼 온전히 받아들여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