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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Oct 13. 2021

퇴원...

죽는 일상의 기록 (4)

엄마는 진짜 죽으려는 건가...


두번째 퇴원후 2주일하고 4일째

엄마는 진짜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만사가... 귀찮고 싫타하는 것이.. 그냥 단순히 투정이 아니라 실지로 그렇게 엄마는 하고 있었다.

그리 좋아하던 먹는 것조차 귀찮다고 약도 먹기 싫다 한다

"살려면 먹어야지! 약을 왜 안 먹냐?"하고 다그치면 아무런 대답없이 그냥 돌아눕는다.

그 행동이 마치,

"그래, 나 살고 싶지않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할려고..."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다시 캐어 묻고 다그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어둡고 고요한 적막이 엄마에게 검은 손을 내밀어 엄마와 세상을 떼어 놓고는, 억울해하고 있는 나에게 작고 보잘것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니가 세상의 순리와 삶과 죽음의 질서를 거부하냐며 무섭게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


나는 커튼을 활짝 젖치고 밖은 아직 환한 낮임을 확인하고나서야 적막따위야,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다고 꺼라고 속으로 되내어 본다.

그러나 엄마는 이리저리 스며드는 어두운 기운에 나약하게 몸을 내던지고서는 환한 바깥 세상이 내미는 손들을 뿌리치고서는 눈이 신다며 뒤돌아 눕는다.



그 험난했던 1217호에서 벗어나서 집에만 오면 엄마는 -남의 눈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옛날 사람의 습성을 지- 엄마는 하디 편한 집에만 오면 예전과 이 생활할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 신경쓰지 않고 큰소리로 수다도 떨 그 이상하던 할매, 와~ 말도 마라, 카면서 욕도 오만상 퍼부어주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본인의 모습을 창피해하지 않고 당당히 내발로 화장실도 갈란다하면서 일바켜 달라고 귀찮게 할 줄로만 알았다.


헌데 엄마는 항상 우리들의 예상밖의 행보를 걸어 왔듯이, 집에 온 지 2주하고 4일동안을 단 한번도 침대 밖으로 스스로 내려서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은 커녕 우리들이 잡아준다고 소란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당겨보고 밀어보아도 엄마는 귀찮아 하기만 했다. 우리에게 의지하고서라도 바닥에 발을 닿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오려 귀찮게 한다고 역정을 내었다.

처음에는 오빠와 내가 양쪽에서 딱 잡고 일으켜 세우면 천천히긴 하지만 분명 엄마의 걸음이었다. 양쪽에서 잡고있는 나의 걸음보다 살짝 앞 서는 느낌으로 식탁으로까지 걸어 나갔다.


언니들은 아직 안 될거라고 천천히하자고 시도해 보지 않았지만 두 번째는 이틀 뒤에 다시 침대에서 목욕탕까지 오빠와 나, 엄마 이렇게 셋이 우리는 함께 걸어 나갔다. 목욕탕에 도착해 플라스틱 의자에 앉혀서 물을 뿌리고 머리를 감기고 비누칠을 해서 샤워를 시켜 줄 동안 엄마는 혼자 힘으로 가만히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 어번을 더 씻는 동안 외에는 엄마는 엄마발로 바닥을 어 서지 않았다.


물론 용변은 침대에서 해결가능했다.

두 번째 입원해서 2주 동안 여러가지 검사를 할 겸 정확한 소변양의 측정을 위해 엄마의 몸에는 소변 줄이 달려 있게 되었고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용변을 해결하지 못한  2주가 흐르고

다시 소변줄을 제거하자 엄마는 화장실을 가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뇨의를 잃어버렸고 결국 적응을 못한 채 침대에서 계속 기저귀로 용변을 받아냈다.


그렇게 시작된 기저귀 생활도 처음에는 분명, 엄마도 우리도 서로 몹시 당황스러울 만큼 민망하고 낯설어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역시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단 일주일만에 우리 모두는 엄마의 기저귀에 자연스러워질만큼 적응을 해버렸다. 심지어 기저귀를 처음 보아 앞과 뒤를 구분조차 못하던 노총각 오빠도 엄마의 기저귀에 능숙해졌다.

ㅡ차라리 우리들이 모든 것이 많이 서투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엄마에게 떼를 써버렸다면 엄마는 오히려 스스로 살아보려 애를 써보았을까. 돌아보면 가끔은 그런 번뇌들이 스치기는 한다ㅡ


그러고 퇴원을 하고 집에 온 후로도 엄마는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가려면 갈 수 있을 듯 했는데 엄마는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력을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할 수가 없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의 속내를 우리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지루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어떠한 작은 변화라도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이 보인다면 몸이 고되고 힘이 들어 쓰러 진대도 우리는 으싸으싸 엄마를 살리는 일에 더 기운이 났을 거 같았다. 헌데 자꾸 몸이 고됨보다 정신적으로 더욱 지쳐갔다. 언니, 오빠들은 정확히 언제 멘탈을 잃었는지, 알 수 없지만은 나는 엄마가 침대에서 발을 내딛지 않은 채 침대서만 생활하기 시작할 때... 그때쯤에 한번 제대로 정신을 놓았던 거 같다.


박국... 박국에 꼽혀서 이모가 끓여 온 박국을 먹기 싫다고 버리라고 소리지르던 엄마에게 나도 같이 왈칵 소리를 질러 버렸다.

서로에게 같이 상처만 내고 말 외침일 줄 알았지만 나도 모르게 사춘기19세의 내가 불쑥 튀어 나와서

"알겠다, 알겠어. 버린다고!! 버리면 되잖아!" 하고 엄마와 같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러고 고요하고 서늘해진 밤공기를 후회로 가득 채웠다.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사람이 렇게 정신줄을 놓는구나싶었다. 후회보다는 이제서야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내 정신과 마음도 빠짝 말라가는 엄마를 따라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 정신을 놓치게 될 내 모습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나를 위로하고 달라진 우리들의 모습에 적응을 하자고 각오했다.



두번째 입원을 하기 전에는 기운이 없고 표적 치료제가 엄마 몸에서 독하게 작용하느라 진을 빼놓아서 계속 아프다. 아프다는 소리를 달고 있었다. 같이 아파 줄 수는 없는 우리는 항암제보다 더 독할 것 같은 마약성 진통제를 어쩔 수 없이 시간맞춰 엄마에게 줘야했고 그때마다

'래, 어차피 완치도 안 될 병이라면 아프지는 말아야지.'하며 독한 약을 버텨내는 엄마와 지켜보는 리를 이렇게 나름의 합리화로 버텨냈다. 약 기운으로 지내기는 했지만 항암제의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는게 가능했다. 그것이 그나마 엄마의 유일한 운동이었고 살아가고 있음의 증거였는데, 그렇게 3주간 두 번째 입원을 하는 사이에 엄마는 스스로 화장실을 못 가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되었다.

먼가 중요한 검사였겠지만... 나는 그 첫 소변줄이 계속 원망스러웠다.


첫 입원때에 엄마는 혼자 화장실을 갈테니 따라 오지마라고 그렇게 말려대서 엄마 링겔걸이를 밀 놓고 모른척 엄마 화장실을 뒤따라 다니던 일이 얼마지나지않아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목숨을 살리는 일도 중하겠지만 사람이 삶의 질이라는 것도 있을지언데, 스스로 자고 먹고 싸는 일을 못 하는 일상이, 그게 과연 무슨 삶의 의미가 있을까, 그저 살리기만 하는데 목적을 둔 의사님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한번은 엄마가 그 두번째 입원을 하기 전에, 넥사바와 싸우는 독한 진통제로 정신이 흐릿한 때에, 아프다고 진통제를 내놓으라고 떼도 쓰고 가끔 약기운으로 아픔이 가시면 수다도 떨며 손주들 얘기에 웃기도 하고 승질도 부리고 욕도 하고 화장실도 다니고, 그나마 을 수 을 때였나보다.

그 때 어느날 엄마가,

"이렇게 눕어서만 있으면 무슨 사람이 사는거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하며 내뱉던 푸념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라이까내 의사쌤하라는대로 치료도 잘 받고 약도 잘묵고 밥도 잘묵고 운동도 좀 하고, 어뜩 어뜩 일나야지..."하며 나약한 마음은 먹을 생각도 하지마라고, 그렇게 내가 랩퍼처럼 대차게 단단히 되받아쳤던 그 말을 나는 그 후로 한참을 곱씹었다.


79세의 엄마의 인생도 당연히 삶의 의미가 있겠지.

늙고 병들고 이제는 살만치 살았다, 후회가 없다, 싶은 순간에도 사람은 삶의 의미가 있어야지. 암만.

엄마의 삶의 의미. 그 속내가 몹시도 궁금하여 엄마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79세 엄마의 머리 속에 그려진 삶의 의미를 조금만이라도 훔쳐보고 그 중 하나만 꺼내서 어슴푸레, 비스무리하게라도 구현시켜 내어 보이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도 다시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고 살고 싶어 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엄마의 머리 속에 들어 갈 재주가 먼 수로 있을까. 평소에 속내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모녀 사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평소에도 엄마 속내는 잘 모르던 딸이었다. 늘 물어 봐야하고 대답을 들어봐야만 알아 챌 수 있는, 그런 딸이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저 깊은 속내의 엄마의 생각은 늘 알 수가 없는 안타까운 딸이었다.



그래, 그래도 그때는 분명 삶의 질을 논하던 엄마였다.

몇 주간의 험난한 병원 생활에서 받은 내적 상처를 치유하면서,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삶을 양이냐, 질이냐를 절대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라도 무조건 양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험한 꼴이어도 무조건 많이, 오래 살아야한다.  단 하루라도 단 한시간 단 일분, 일초라도 더 길게 살아 내야 한다. 그것이 남겨진 자들의 이기심일지라도  세상은 늘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하건데... 지금의 엄마는 삶의 질따위, 양따위는 싸그리 다 무시하고 식사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집에 온 뒤로, 병원밥, 정확히 말하면 병원죽이다.

그 동안 단조로운 병원죽에 질려서 엄마가 입맛을 잃은 것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맛난거 좋아하고 먹는 낙으로 사는 엄마가 식사를 거부할리가 없다고, 우리 날개가 살짝 꺾인 독수리 4남매는 각자의 방법으로 엄마의 입맛을 돋우면서 엄마의 몹쓸 암세포나 혈당에는 나쁜 영양을 주지 않을 참으로 어려운 음식들을 궁리하고 공수해왔다.


엄마가 좋아하던 도가니탕은 배달도 안되는 집이라, 대구 서쪽끝에서 동쪽 끝까지 사러 다녀 와야 했고, 엄마의 단골 꼬리곰탕집은 또 대구밖이었다. 뭣을 이래 전국적으로 맛집을 다녀 길들여진 입맛이었던건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엄마 입맛을 사날랐다.

하루는 대게가 먹고 싶다했는디, 이 뜨거운 한여름인 8월초에 대게가 어디있냔 말이다. 금어기라 잡지도 못하는 시기일텐데, 아쉬운따나, 커다란 냉동 꽃게를 사다가 삶아서 살을 쏙쏙 발가줬다.

오빠는 문어를 좋아 했던 엄마가 전부터 철따라 문어 한 마리씩은 먹어주어야 기운이 벌떡 난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며, 문어를 먹여 보겠다고 했다.  가뜩이나 치아도 부실한 엄마에게 질긴 문어를 먹일 방법을 고민하다가 잘 삶은 문어를 살짝 갈아서 죽을 끓여서 주었다.

엄마네 옆 아파트살면서 수시로 엄마집에 들락날락하는 작은 형부가ㅡ운전일을 하는 사람답게 입맛도 엄마만큼이나 까다롭기로 소문이나서 어딘가로 가서 얇디 얇게 썰은 보드랍은 소고기를 구해 와서 입에서 금세 살살 녹도록 구워 주고, 살아서 펄떡거리던 장어구이를 포장해 와서 병수발중인 3호 오빠랑 먹고 기운내라는데, 오빠는 아깝다며 단 한 입도 먹지를 않고 엄마를 기어이 다 먹였다.


아, 그 보양식 행렬 와중에... 엄마는 이모랑 즐겨 먹었던, 기운이 없을 때면 이모랑 둘이서 칠성시장에 가서 닭발을 한 봉다리 사와서 푹~삶아서 뜯어먹으면 기운이 벌떡 났었다며 퇴원하던 날 집에 가면 그게 젤 먹고싶다고 해서,

이모와 2호인 작은언니가 번갈아 여러 차례 닭발요리도 해날랐다.

구미에 살고 있는 1호 큰언니는 환자에게 좋다는 환자 균형식을 종류 별로 사 보내기 시작했다. 환자식이 음료부터 젤리, 양갱, 치즈등등.. 종류가 참 다양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지만, 희안하게 몸에 좋다는 것은 입맛에 맞지 않다고 다 먹지 않는 엄마가 꼭 우리집에 사는 9살 꼴통시끼하는 짓이랑 꼭 같이 음식투정을 부려서 우리들의 기운이 쏙 빠지게 했다.



어떠한 영양식을 공수해와도 엄마는 병원에서부터 시작된 식혜에 대한 집착이 식을 줄 몰랐다. 병원에서도 소문이 나서 간호사도 의사도 엄마만보면 식혜드시지말고 식사를 하시라고 잔소리를 하고 갔다.


식혜와의 전쟁... 그 시작은 사실은 4호 나였다.

응급실에 구급차를 타고 와서 두번째 입원을 하던 그 다음날, 병원 응급실에서 처음 마주한 엄마는 또 한번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었다.

이틀간을 병원에서 내내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대느라 엄마는 거의 이틀을 물도 한모금 못 마시고 지쳐가고 있노라고 1, 2, 3호들에게 번갈아 소식을 전해 듣고 담날 병원에 찾아 갔을때, 엄마의 모습은 마르고 앙상한 것도 그러하지만... 기운없이 무기력하게 대여섯 시간이상을 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쓰러져 있던 엄마의 모습은... 그전에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다. 아무리 말기암환자였어도 아직은 엄마는 나에게는 엄마였다.

언뜻, 그때까지는 상상차 하지도 않았던, 이러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충격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마침 내가 도착하고 얼마되지않아 금식이 풀렸다.

일반 병실로 옮긴지 얼마되지 않았고 병원 밥시간이 훌쩍 지나간 늦은 밤이었던 지라 병원밥이 없을 거라고 누군가가 미리 사둔 죽을 떠먹이려니, 몇 끼니를 걸렀는지, 목이 맥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수저를 놓는 엄마가 너무 가여워서 '사람이 살게는 해줘야지, 이래 굶겨서 어쩐단 말이고오~' 하면서 내적으로 승깔을 오지게 함 부리믄서 지갑을 들고 2층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지금 엄마가 기분이 좋아지도록 맛나서, 그래서 삶의 의욕이 번쩍 들어서 밥을 와구와구 먹고 싶어지게 할 만한 먹을거리가 머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한 후에, 플레인요구르트, 쌀로 만든 카스테라, 그리고 문제의 비락식혜를 하나씩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다른 것들은 다 거절당하고, 오랜만에 만난 달다구리한 식혜에 엄마는 바로 꼽혔다.

잠깐 그러고 다시금 죽이나 밥같은 끼니로 입맛이 돌아와, 잘 먹을 줄 알았다. 당연히, 끼니가 주식이니까, 그리고 사실 평소에 엄마가 식혜를 그렇게 집착을 할 만큼 좋아했던 편은 아니라서 당연히 다시 밥을 먹을 줄 알았다.

그 후로 엄마가 끼니때마다 식혜를 내놓으라고 하고 단것집착하고 우리들과 이, 말도 안되는 실강이로 진을 빼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 홧김에라도 의사님들이 시키지않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우리 4남매는 식혜와 건강식사이에서 엄마와 위험한 대치를 하고 있다.

"퇴원하면 식혜를 큰 병으로 한 병을 사서 나 혼자 벌컥벌컥, 다 마셔버릴꺼다."라던 엄마의 다짐과 협박을 차라리 응원해주었어야하나.

두번째 퇴원 후, 지금은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목구멍에 음식물이 전혀 넘어가지 않는다는 엄마를 종일 애타게 지켜보면서,

그때 그 협박을 진즉에 적당히 타협을 해주었어야하나 계속 말리는것이 맞는건가... 지금도 나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말하는 삶의 의미 차원에서 따져 보면 맛난 것을 실컷 먹고 사는 게 의미있는 삶이 맞는 것이지 싶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혈당이 올라 가고 몸이 더 아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잠시 잠깐의 쾌락을 삶의 의미라고 믿는 엄마의 잃어버린 판단력을 되찾아 주려 용을 쓰는 게 맞는 건지.

나는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에게는 답안지가 없다. 정답이 없는 시험지같았다.

다만, 언젠가는 지금의 이순간을, 엄마의 이 작은 쾌락을 말렸었던 지금 이순간을,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불안감 같은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집 행동파 둘째 언니가 단톡이 왔다.

요번주 목요일에 병원에서 피검사하고 다음날 금요일에 의사님과 외래진료를 하기로 예약이 잡혀있었는데 ㅡ 이것도 지난 번 외래진료에서 엄마의 피검사와 진료를 한꺼번에 하느라 장기간 병원에서 대기한 엄마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 해서 엄마는 의사진료 전날에 후딱가서 피검사는 미리 해두고 담날은 엄마는 집에서 쉬고 작은 언니나 오빠만 병원에 가서 의사의 피검사 내용과 앞으로의 진료 계획을 듣고 약을 처방받아 오기로 일정을 잡았던 것이었다.


작은언니의 메세지 내용은

[그냥 목요일 오전에 119를 불러 응급실로 바로 들어가야겠다.]

라고왔다.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응, 링겔이라도 맞아야지. 안되겠어.]

소심쟁이 큰언니도

[응, 그래...]하고 답이 왔다.


응급실로 바로 간다는 것은 입원을 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병실을 배정받아 입원하는 일은 외래진료에 가서 결정하는 것보다 응급실을 통하는 것이 병실을 배정받기가 더 빠르다는 것을 우리는 암환우가족이 된지 두 달 반만에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응급실은 입원이었다. 그리고 응급실은 119다. 응급실도 그냥 개인으로 가면 쉬이 들어갈 수 없다. 동네 병원 의사의 동의서나 머 그런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나라에서 인증해 준 중증 암환자인 엄마는 119를 타고 응급실로 직행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입원의 방법이라는 요령이 딱 두 달만에 생긴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모든 일들이 오늘로 딱 76일째가 되었다.

한 76개월은 흐른 느낌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초여름의 하늘이 어찌나 푸르르고 예쁘든지, 세상에 엄마는 저렇게 누워서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데, 하늘 왜 이렇게 예쁘고 세상은 왜 이렇게 잘 돌아가고 지랄이야~ 하면서 엄마를 닮지 않아 평소에 욕따위는 입에 담지도 않던 내가, 그렇게 혼자 세상에 욕지꺼리를 하며 초록초록한 논두렁과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원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퉤~ 다시는 내가 날 좋은 날에 이 길로 들어 서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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