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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Nov 01. 2021

유지숙 여사

죽는 일상의 기록 (3)

1943년 7월 26일,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유지숙여사는 위로는 오빠가 둘, 아래로는 4살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고향은 본디 만주나 북쪽, 그 어디메쯤에서 태어났는데 해방과 동시에 서울로 내려와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서울 사람이었다고

한다. 엄마의 아버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경찰이나 군인같은 공무원의 직업군이었단다.

6.25가 터지던 해에 엄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또래보다 작던 첫째 딸이 애처로워 엄마의 아부지는 군용 차같은 네모낳고 까만 차에 엄마를 태워서 학교 데려다주셨는데 아부지가 없을 때는 군인같은 청년이 운전을 하여 학교에 데려다주었던 기억이 난다했다. 

그시절에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고? 그때에 차가 있었나?싶은 시절에 살았던 엄마가 나도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누렸다니 엄마의 유년시절의 정체는 머냐고? 우리는 웃으면서 드라마같은 이야기다 싶었다.


그 시절에는 다들 책가방이 없어서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춤에 묶고 학교를 다녔는데 엄마는 아버지가 입학 선물로 검정색 가죽책가방과 검정색  가죽구두를 사줘서 학교서 몇 안되는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학생이었더란다.  잠깐의 유복한 어린시절을 경험해서인지 엄마는 유달리 손이 크고 형편이 녹록치 못  베품이 크고 돈 씀씀이가 늘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그 덕에 엄마와 아빠는 늘 열심히 살았지만, 넉넉하다싶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는 인생들을 살았다.

어른이 되어 철이 든 우리가 살짝 경제개념이 없 싶을 정도로 씀씀이가 큰 엄마를 가끔씩 나무라기도 했다.

  


어린시절에 엄마의 추억  아버지는  키가 엄청 커서 꼬맹이었던 엄마가 마당에서 아버지 다리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놀았다고 했다. 예닐곱  쯤이었으니 엄마의 아버지는 분명 키가 엄청 컸었고 자주 얘기하곤 했다.

우리 독수리4남매는 넷 다 연배에 비해 키가 큰 편인데, 그것은 그 옛날 사람임에도 키가 182cm

였던 우리 아빠장신 유전자의 힘이라고, 150cm 초반의 단신인 엄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키가 작은 엄마 놀리는 말이라도 하면, 꼭 신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유전은 한 세대씩 걸러서 전해지니, 우리들의 장신 유전자는 한 번도 뵌 적도 없는 우리들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지 모른다했다.


그렇게 엄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여름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나자말자 엄마의 어머니는 바로 아버지를 다락방에 숨기고 입구를 가구따위로 막아버리셨다고 한다. 공산당에게 잡혀간다고 며칠째 다락 밖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어느날, 아버지의 단짝 친구가 와서 꼭 봐야할 일이 있다고 사정사정을 하더란다. 그래도 단호하게 남편은 지금 집에 없다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한사코 말리며 못 나가게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저 친구는 믿을 만한 친구라며 괜찮다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가 그길로, 그길로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그시절 가죽가방만큼이나 귀하고도   사랑스럽던 첫째 딸은 그  이후로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로 가셨는지, 79세가 된 지금도, 엄마 당신 아버지 행적은 물론이고 생도 도무지 알 수가 는 채로 70년을 넘게 살아왔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며칠동안 엄마의 어머니는 남편을 찾아 미친 듯이 다녔지만

야속하게도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한, 그 정신없는 어느 날, 커다란 군인 트럭이 여러 대 집 앞에 와서는 엄마네 가족들이 쓰던 가구며, 쌀이며, 그릇이며, 옷가지며... 장독대며... 살림살이를 몽땅 차곡차곡 트럭에 실어서 가져 가버렸단다. 장독대를 실어가다가 고추장이 담긴 독이 깨져서 보슬비가 살살 내리던 오후에 마당이 온통 붉은 고추장물로 붉게 물들어서 동네사람 대여섯이서 깜짝놀라, 이집에 누가 죽어나갔냐고 달려 왔더란다.




빈집에 4남매만 덩그라니 남겨진 엄마의 어머니는 그제사 정신을 화들짝 차리고 사라진 남편 찾기는 포기하고 옆 집에 가서 쌀을 빌려와 주먹밥으로 도시락을 야무지게 챙겨서 4남매를 데리고 피난 길에 올랐단다. 그사이 혹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경상도쪽으로 간다고 어디쯤에 기다린다고 꼭 전해달라고 이웃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어느날 밤에 길을 나섰단다.

철모르고 아버지찾아 소풍가는 줄 알던 두 딸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행렬 속에 하염없이 걸었단다. 어느날 밤인가 번개같은 포탄소리도 나고 대포소리 속에 이불을 뒤집어 덥혀 고 도망다니면서 그제서야 떼쓰고 어린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참내, 그때 사람들은 참 순진하고 어리석었어. 총알이 날라가고 포탄이 날라드는데, 이불이 총알을 막아내는가. 그래도 다들 총소리시작되면 이불을 덮어 쓰고 그속에 납닥 업드려 있었어." 하며 엄마는 희미하게 웃었다.


엄마의 피난 일행은 아버지일가와 삼촌일가 거기다가 어느 집의 사돈 일가까지 모두 모여 떠나는 대이동이었다. 어디어디서 만나 남으로 내려가는 기차얻어 타고 대가족이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좌석이 어디 있냐며 화물칸이며 기차 지붕이며 어디든 붙을 데만 있으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그렇게 초초초만원 기차는 남쪽을 향해 꾸역꾸역 달려갔단다.

대전쯤왔을까 어느 순간에 엄마의 작은 오빠가 사라졌다고 어머니가 놀라 소리쳤단다. 나중에도 참 똘똘했지만 사소한 사고를 잘 쳤다는 작은 오빠를 찾아서 아버지와 삼촌은 기차철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나머지식구들은 더이상 발 붙일 데도 없는 만원기차에서 어쩔수없이 하차하여 지태오빠를 찾아간 아버지를 기다렸단다. 하염없이 지태야~ 지태야~ 를 목놓아 부르는 어머니치맛자락을 놓칠 새라 단디 잡은 엄마는 4살 아직은 아기같은 여동생의 손 놓치지 않으려고 야무지게  쥐 오빠를 기다렸단다.


우여곡절 끝에 하루인가 이틀만에 삼촌들이 지태오빠를 찾아오고 뒤쳐진 피난 행렬에 다시 겨우겨우 비집고 들어가 남쪽으로 더 내려와서 엄마네 가족이 터를 잡은 곳은 가창이었다. 

가창은 엄마의 삼촌이자, 버지의 동생이  발파 기술자로 일하면서 잠시 터를 잡고 있던 곳이라 엄마네 대가족 일가는 그나마 연고지가 있는 가창 전쟁을 피할 피난터로 자리를 잡로 했단다.

그 이후로 전쟁이 끝나고나서는 오히려, 사돈의 팔촌까지 온 가족을 삶의 터전으로 눌러 앉게 한 작은 아버지네 일가는 다시 서울취직해서 가창을 떠나시고, 엄마의 큰아버지네 일가는 사라진 동생인, 엄마의 아버지가 북에 끌려갔을 거란 소문때문에 받을 불이익들을 피해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단다.  바람에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우리 엄마네 식솔들만 가창에 남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 우리는 서울할아버지라 불렸던 엄마의 작은 아버지댁을 두어 번 간 적이 있었다. 서울에 3층 집에 살던 서울할아버지와 서울 삼촌네  집은 어린 내 눈에는 대궐같았다. 진짜 소리가 나는 피아노가 있고 보일러가 따뜻하게 나오는 집 안에 있는 주방이 있는 서울 삼촌집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사라다는 아직도 내게는 서울, 도시의 맛으로 여겨졌다.

그런 멋진 서울 살이를 하는 서울 삼촌네 집만 가면 마냥 들떴던 꼬맹이의 눈에도 형제와 가족과 헤어진 깡마른 서울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경상북도 가창은 대구에서 청도가는 길목에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청도에 있는 온천을 VIP회원증을 받을 만큼 자주 다니며 가창을 지나갈 때마다 엄마는 어린 시절의 추억얘기 해주었다.

엄마의 제2의 고향 가창 어귀, 그 길목에 엄마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컸는데 너무 작아졌다며 아쉬워하던 엄마 얘기에 어느날에는 독수리2호, 작은언니가 엄마의 국민학교에 엄마와 이모를 내려주었는데 그렇게 좋아할수가 없더란다.


그시절 엄마의 가창국민학교 시절 친구들을 엄마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79세에 처음 암환자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도  시절 엄마의 친구들로부터 바로 연락이 왔고 두 분이 놀라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엄마를 만나지 못 하고 아쉬움과 걱정으로 눈물을 삼키며 발길을 돌리셨다.

적잖히 70여 년간을 유지해 온 우정이 있다니... 가끔 자기 주장이 몹시 세고 세월의 풍파 속에 삐딱하고 속좁은 아줌마로 변해 왔을 지언정, 70년지기 우정이 있 엄마가 나는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겨우 20년지기 우정도 버티기가 힘들 판이었는데. 70년지기 친구라니, 그런거 보면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엄마는 주변을 챙기며 사는 인생을 살았왔었구나 싶었다.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낯선 곳에서 홀로 어린 4남매와 정착한 엄마의 어머니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평소에는 절대 만지지도 못 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생선장사부터 시작을 하셨단다.

서울에서의 엄마의 어머니는 그 시절 나름 소학교까지 나온 신여성이었다는데 4남매와 살아 남기위해 장사치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했고 그런 어머니를 따라 살림밑천이라는 맏 , 엄마도 그때부터 하교와 동시에 시장통으로 출근하여 어린 시절 장사꾼으로 자라났단다. 그바람에 엄마는 다른 공부보다 특히 산수를 잘한다 했다.

그렇게 생선을 팔아서 엄마의 어머니가 작은 담배 가게를 마련했을 때는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하여 엄마의 10대 사춘기시절은 담배빵 점원의 일상을 살았단다. 

 후로 엄마의 오빠들이 공부를 하러 서울에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엄마도 오빠들을 따라 가서 공부하는 오빠들과 사촌 오빠들까지의 밥을 차려 대고 뒷바라지를 해대며 학교를 다녔단다.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하긴 했지만 엄마는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지만 서울살이가 좋았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는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그 그늘은 남아 있었던, 아버라는 존재감으로, 아버지의 후배의 도움으로 왜관에 경찰 교환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단다. 

엄마의 어머니와 아직 어린 여동생과 함께 왜관으로 거쳐를 옮이서 엄마의  시절을 보냈다 했다.

그 시절 나름 신식 직업을 가진 전문직 여성으로써 엄마의 20대는 화려했다. 캬츄사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수작을 걸기도 했지만 엄마는 도도하게 거절하는 줏대있는 아가씨였다고 했다.

그런 엄마의 화려한 인기녀로써의 20대 시절의 이야기들을 우리들은 절대 곧이 듣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엄마는 늙고 예쁘지 않은 세기만한 세월속의 아줌마일 뿐이었으니까. 종종 아빠가 - 그 화려한 시절의 엄마와 결혼 하기 위해 영천에서 소 한마리를 끌고 왜관까지 가서 엄마를 쟁취했다는 한 때, 사랑꾼이었던 우리 아빠가,

"너거 엄마, 참 예뻤지. 뽀얗고 동글동글하니 꼭  엄앵란같이 예뻣어. 아빠가 한눈에 반했지." 하 아빠의 술주에 우리는 아무리 봐도 뽀얗고 동글동글 예쁜 엄마는 도무지 찾을 수없는데, 희안한 일이라고 했다.

다만, 우리 시절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살짝 먼 엄앵란 같았다는 말까지는 인정해 주기로 했다.

"인물로 치면 아빠가 잘 생겼지. 신성일이 저리 가라야. 키도 훤칠하고." 하며 우리들의 어린 눈에 부리부리한 눈매에 짙은 쌍거풀과 오똑한 콧날을 가진 아빠의 서구적인 외모만 칭찬을 해댔다. 그러면 아빠는 꼭 덧붙였다.

"시골 촌 놈한테 시집와서 고생하느라 너거 엄마가 저리 되었다. 너거 엄마가 더 예뻤다. " 고.

엄마는 그런 아빠 소리가 지긋지긋하다며 헛소리 집어치고 잠이나 자라고 소리쳤다.


그런 날 저녁이면 엄마의 악다구니가 큰 싸움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눈치보던 어린 내 눈에는 엄마는 너무 세고 아빠는 너무 약해 보여서 속으로는 아빠가 쨘하고 불쌍하지만 겉으로는 또 엄마 편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엄마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엄마의 그 때의  악다구니들이 공감이 갔다. 금이었다 속으로 쨘해하 아빠한테,

"그러면 그렇게 고운 엄마를 고생을 덜 시키지 그랬어. 왜 그랬대?" 하고 따져 물었을 테다.

어찌되었던간에 애정의 크기보다는 고생의 원인 제공을 한 아빠의 위로 엄마에게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그 무책임하 내뱉는 위의 말들이 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아빠와 성격이 똑 닮았다며 키크고 싱거운 거까지 비슷하다고 엄마가 늘 탐탁치 않아 했던 내 남편 살면서 나도 가끔씩 그 때의 엄마와 같이 악다구니를 질렀고 그러면서 그때 엄마같은 절망감같은 것이 조금씩 느껴졌다.

한 사람인 것도 확실하고 배우자를 아끼고 존중하는 것도 맞지만 그 외에 모든 일들에서는 사람 속터지게 하는 남자. 그런 남자가  아빠와 내 남편의 공통점이다.

그래도 나는 그런 남자와10년 쯤 살 어느 순간 포기를 한 것인지, 깨달음이 생긴 것인지, 라리

독하고 야무진 남자보다는, 속이 터져도 착해빠지고 먹혀 들어가도 않는 위로주는 남자와 사는 것에 더 만족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보다 삶이 더 팍팍하고 힘들었을 엄마는 끝끝내 그러지는 못 했던 거 같다.

아빠도, 엄마도, 나름의 삶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서로를 이해시 자신이 없었던 우리 자식들은 그런 어긋난 채로 사는 엄마, 아빠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지켜만 보았다. 관심을 가장한 이해라면 이상한 말인가. 때로는 어떤 깊은 혼자만의 감정에는 타인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진짜 배려일 때도 있다.


"키크고 싱거운 남자 만나면 여자가 얼마나 고생을 해야 될 낀데..." 하며 엄마는  나를 안타까워 했고 그런 엄마에게 나는,

"아이고, 우리 아빠는 잘 생기기라도 했지. 이서방은 못 생겼잖아. 한 개도 안 똑같다. " 하며 마에게 위로같지 않은 위로를 하며 또 아빠편을 들 주었다.


우리들의 엄마, 아빠도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촌놈인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아빠를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대구에서 딸기쨈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아빠는 그 이후로 거의 40년을 봄에는 딸기쨈 전문가로, 가을에는 통조림의 밤 선별 전문가로 살았다.

"촌에 거 1, 2년 살아보이 답이 없드라고.

느그 아빠 무슨 종매로 너거 할부지 밑에서 농사을 줄빠이 모르고 농사를 짓는다고  넉넉하이 너들 키우며 살기 어려버 비서, 딸랑 냄비 하나, 수저 두 벌, 이불 한 채 들고 대구로 안 나왔나." 하며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지난 삶을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 차서 추억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도 나는 이리 살았을끼다." 하며.


촌에 땅 꽤나 있는 부잣집 외아들, 그것도 손이 귀한 집에 3대 독자였던 아빠와 결혼하면 아무리 촌이라 그래도 촌 부잣집이라니 엄마는 살 만하게는 살 줄 알았단다.

그 시절에 아빠의 고향이자, 우리들의 본적지인 영천에서는 우리 할아버지이신 이씨성의 상조네 땅을 밟지 않으면 영천 아화를 못 지나간다 했단다.

그런데 엄마못지 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의 아빠는 출생의 비밀로 3대 독자의 그 귀함을 전히 누리지 못하고 그저 시골에서 농부로 일만하며  있는 아빠가 엄마는 딱하더란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손에, 아니 발에도 흙을 한 톨도 묻히지 않고 살아오셨다.

내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빳빳한 하얀 한복 저고리에 노오란 호박 단추가 달린 조끼를 입은 할아버지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겉표지가 누런 옛날 한자가 득 적힌 책을 늘  읽고 계셨다. 그런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손에 흙을 묻힐 수 없다했고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넓은 전답의 온갖 굳은 농사를 도맡아했단다.

엄마는 평생 이렇게 살 것 같은 아빠에게 고마, 도시로 가자고 설득을 했단다. 까운 가서 어데 공장에서라도 일하면 이것보다는 낫게 살면서 애들도 키울 수 있을 거라 했다.

아빠와 엄마가 대구로 떠나고 나니, 농사를 맏을 아들이 사라진 할아버지는 여전히 농사를 짓지 않으시고 땅을 하나씩 하나씩 처분해서 남은 여생을 노동이라는 것을 일절 해보지 못한 채 돌아 가셨다.


할머니는 손자들인 우리들을 유독 미워했다. 보통 어린 시절 할머니들은 다들 인자하고 머든 다 들어주는 K-할머니의 추억으로 가득할텐데, 우리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우리들을 늘 혼을 냈다. 밥그릇을 빼앗기기는 여사였다.

그런 대접이 속상해서 엄마는 할머니댁에 가기 전에는 우리들 밥부터 가득 먹였다. 우리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우리집 4대 독자 오빠에게도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야 알 게 되었지만 손이 귀한 집에 시집 온 우리 할머니는 자식을 낳지 못해 모진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고 넘의 자식인 우리 아빠를 아들로 키워냈다.  아픔만큼 할머니는 아빠와 그의 자식들인 우리들, 손자들이 미워했던 것 같으다. 또 농사일 버리고 도시로 떠난, 키워 준 아들과 며느리일가가 곱은 않았겠지.


어린 아빠는 딱히 큰 꿈도 없이 그저 착하고 성실하게 시골에서 일을 도우며 자라왔는데 농사를 짓느라 학교를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했다.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아빠가 머리가 좋아서 뭐라도 잘 했을 껀데..." 하던 아빠에게

"아빠는 어릴 때 꿈같은 거는 없었나?꿈이 머였노?" 하고 막내딸이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하던 아빠가 어느 날

"아빠, 어릴 때말다. 키도 크고 농사일을 하도 해서 몸이 단단했단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갔더니 어느 선생님이 배구부에  드라고. 그때 배구를 잘 했는데, 계속 그래 했으면 저래 텔레비젼에 안 나왔겠나. " 라며 아빠는 텔레비젼 속 배구경기를 유심히 보았다. 아빠는 농사 일을 해야 한다고 배구부 못 게 한 할아버지를 그때 처음으로 원망했다고 했었다.




내가 알 수없는, 보지 못한 엄마의 유년 시절들의 이야기가 쉽지가 않다. 내가 알 수 없는 일들이니 담아두기도 쉽지 않고, 내가 보지 못한 엄마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들을 단편, 단편으로 들은 에피소드들을 짜집기해 가면서, 이때껏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지 않은 엄마어린 시절이, 엄마에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겠나를 처음 깨달았다.  참 우끼는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강철의 엄마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텐데, 나는 엄마는 원래 그렇게 처음부터 강철같은 내엄마로 생성된 사람인 줄 알았다.

마의 리고 약하던 코스모스같은 시절은 단 한번도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엄마의 알 수 없는 시절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이유는,

엄마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엄마의 그저 평범했던 일생을 변명주고 싶었다.

마지막에 엄마가 남겨 놓은 우리들 넷과 우리들 추억속 엄마일생이 그냥 무심하게 지워지고 잊혀지는 것을 엄마는 달게 받아들일까.

79세의 말기암환자의 마지막 일상에서도 아픔보다는 삶의 의미가 더 중하다 하던 엄마에게 나라도 삶의 의미를 기록해 주고 싶다.

세상에 살다간 흔적, 한 발자국은 남겨 주어야 엄마의 이 파란만장한 평생이 덜 억울할 거 같았다.


나에게는 늘 강철같은 엄마가 사경을 헤매던 어느날, 엄마의 엄마를 애타게 찾으며 이제 엄마한테 가고 싶다하며 내 손을 꼭 잡던 그 날에서야 나는 코스모스같이 여리여리한 소녀 시절의 엄마를 보았다.





일요일인 어제 오후에 얼마만인가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을 산책 길을 나섰다.

나서다보니 엄마네 집 앞, 엄마가 아프기 전에 운동하러  니던 공원으로 들어섰다.

눈치없이 나를 리로 이끄는 저 싱거운 남편은 과연 무슨 생각일까,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오만가지 생각을 다 또 이끄는 대로 그냥 두었다.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남겨 두고

남은 이들끼리 손잡고 걷자. 그래, 걸어보자.


하늘도 맑고 물냄새도 좋고

바람도 선선 날 이어서 걷기 딱 좋은 날이다.


집에 돌아와서 딸 아이가 찍어 놓은 어설픈 사진들 속, 길가에 핀 작은 코스모스 한 송이를 보고 

알 수가 없는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이 스쳐 지나는 듯 해서 왈칵 눈물이 났다. 엄마는 자기가 늘 코스모스같은 여자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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