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주 Dec 02. 2021

호스피스병동

죽는 일상의 기록(8)

간호사가 성형외과 가 잡혔고 안내를 하고 간다. 의식이 왔다갔다하고 이번 주를 넘기기 어렵다는  말기암 환자에게 무슨 성형외과인가 하고 정신이 들었다.

3일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온 날,

혈압이 너무 낮다고 혈압을 올리기 위해 엄마의 온몸에 온풍기의 열을 아 체온을 올리는 처치를 했고 엄마는 뜨거움도 잊은 채 사경을 헤매느라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고 보니 응급병동으로 오고 나서, 한번씩 엄마의 정신 는 외침들 나도 같이 충격 휩싸이느라 더 신줄을 놓고 미처 예민하게 반응을 못 하던 사이에 간간히 엄마는,

"아파, 아파." 하고 앓기도 했다.

"어디? 어디가 아픈데? " 하고 급히 물으 아이

같은 목소리로 삭이듯 되뇌였다.

"다리... 아파..."

영문도 모르고 나는 다리를 주물러 주면 나을까 싶어서 엄마의 허벅지를 열심히 주물러 줬는데, 마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면서 종아리에 화상의 아픔이 느껴지고 그제서야 쓰라렸던 모양이다. 것도 모르고 화상고름이 나오는 다리를 주물러

댔으니.

응급실에서 옆을 던 큰언니는 한참 후에까지 엄마의 다리 화상을 보며 치 자기탓인냥 스스로

를 원망했다.

"엄마 다리가 저렇게 디 지고 고름이 나오는 지도 모르고 나는 그냥 치료하는 거나싶었지, 다리를 들다 볼 생각도 했어. " 하며 엄마종아리 화상자국을 볼 때마다 울음을 삼며 자책했다.

"엄마 피부가 얼마나 여리고 곱은 피부인데, 그걸 담요를 들쳐 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래. 평생을 작은 화상 상처 하나없이 지킨 피부인데."

한참을 스스로 원망하던 큰언니는 본인의 팔에 큰 화상 상처가 있다.

어릴 적에 촌 할머니집에 부뚜막을 내려다보다 끓는 물에 떨어졌단다. 그걸 소독하거나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간장을 발라 둔 할머니를 엄마는 내내 원망했고 큰언니는 대구의 뜨거운 한 여름에도 아직까지 반팔 티셔츠를 입지 않는다. 언젠가 큰언니가 아줌마가 되고나서 엄마가 화상 흉터성형이 될꺼라고 해보자고 했는데 큰언니는 아줌마가 다 되서 머하러 냐며 되었다고 했다.



젊은 의사 둘이 와서 엄마침대를 끌고 갔다.

화상 소독을 하기 위해 아랫 층에 있는 성형외과 처치실, 처치실이라기에 그냥 성형외과 의사들 휴식 공간 같 보였다. 한눈에 대충봐도 어수선

했다.

죽고 사는 깊은 병의 환자들이 모인 응급 병동에서 성형외과는 존재의 의미가 없었던지 처치실도 마치 휴게소같은 분위기였다.

젊은 의사가 엄마 종아리의 붕대를 풀면서 자기들

끼리 엊저녁에 소개팅을 한 얘기인가 먼가를 실실 웃으며 했고 한쪽 옆에 또 다른 젊은 의사는 소독

용품을 챙기며 차트지같은 파일로 탁구를 치는 흉내를 며 요즘 탁구를 배우고 있다고 그들만의 화개애애함으로 가득찬 성형외과 처치실이었다.


러는 사이에 풀려진 붕대 사이로 보이는 엄마의 종아리 살갗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손이 떨려와서 환자용 침대 난간을 간신히 붙들 꽉 힘을 주고 섰다.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종아리 뒤편으로 고름 가득 차 올라 와 누런 고름띠가 줄 서 있었다. 누런 고름으로 둘러싸인 종아리가 수포로 팅팅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얼마나 쓰라렸을 지 소름이 끼쳐 와서 이를 꼭 깨물었다. 여린 엄마의 살을 둘러 싼 수포덩어리

들을 바늘로 터트리 아무렇지도 않게 소독약으로 슬슬 닦으면서,

"어쩌다 이랬대요?" 고 동정심따위라곤 1도 없 성의없는 말들을 내뱉는 의사들이 야속했다. 

"햐... 이러면... 심한 화상이.. 죠?아.. 너무.. 많이 아프.. 겠는데..."

속상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눈에 웃음이 가득한 그들과  마주 치고 싶지 않았다. 아픈 이에 대한 애잔함 따위는 아예 없는 들에게 관심도 없을 상처의 사연에 답할 가치도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잔인한 공간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여기 병원 응급실에서 혈압을 올린다고 열풍을 싸서 이렇게 되었다하네요." 하고 나즈막하게 답했다. 속으로는 '너네가 그랬잖아.' 하고 원망섞인 눈빛을 보내는 것을 아는지 모르든지, 의미도 없는 이들을 뒤로 하고 정신이 없어 내말을 새겨 들을 수도 없겠지만 그들보다는 대화 가치가 있을 내 하나뿐인 엄마에게

"이렇게 씨게 디놓코 왜 아프다고 말도  했어. " 하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이 행여나 불길에 데여 고름이 철철 흘러 내려 는 걸 목격한다면, 아무리 모르는 이라도 마음이 어찌할 지 모르게 아프고 심장이 쿵쾅댈  같은데 이들은 내엄마의 고름이 철철 흐르는 종아리를 앞에 두고 실실 농담을 하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잔인함을 전달하는 병원

이라는 곳이 너무 아팠다.



응급병동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느라 침대가 덜컹했다. 고요히 눈을 감고 모른체 하고 있던 엄마가 새로운 병동에 자리하자 말자 

" 여긴 어디?" 했다. 그것은 아마 나를 어디로 또 끌고 와서 나에게 무슨 짓을 할거냐 하는 물음이지

만 기운도 하나없고, 발음도 어눌한 그 물음이 의도를 잃은 느낌이었다.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서 엄마는 말이 어눌해지고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로 의사소통을 했고 그나마도 알아 들을  없는 말들

을 수시로 했다.

응급병동에서 의식이 돌아온 후 처음으로 나에게 한 말은 "꽃벼.. "이라고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 꽃병?꽃병 있는데?어어. 꽃병 있는데 머 있어?" 

"대구.. 토.. 장.. "

"어어.  대구은행 통장이 있어?통장, 왜?장에 돈 있어야 해?"

" .. .. 삼.. 만.."

"어. 그래, 매달 초에, 초에 3만원 넣어두어야 한다고?" 눈으로 끄덕이는 엄마에게 

"알았어. 알았어. 내 절대 안 잊아뿌고 매월 초에 대구은행 통장에 3만원씩 넣어둘께. 걱정하지마" 하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ㅁ 되.. 써. " 하고 엄마는 안심하며 다시 눈을 으려는데 나계속 내가 누군지 알겠냐고 묻고 또 물으며 확인의 말을 건다.

걷는 법도 잊어버리더니 이제는 말하는 법도 잊어

버릴까 마음이 또 조급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엄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 이내 귀찮다고 눈을 감아 버린다.

요사이는 이런 식의 대화였다.

식사는,  못하게 했다. 수액으로 영양분과 필요한 약은 다 넣어주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삼키지 않은지 며칠이 되었다. 배고픈거 못 참는데 끼니를 끊은게 안타까워 미음이라도 좀 먹여보려 했는데 간호사들이 기도가 막히믄 큰일이라고 말렸다. 물과 간간히 좋아하던 수박쥬스만 쬐금씩 수저로 입을 적셔 먹주었다.


일반병동으로 온 날 저녁에 엄마는 에법 길게 말을 했다. 의식을 잃은 지 서너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병동로 옮겨 왔어. "

" 나 아직.. 안.. 죽 었어?" 하는 엄마의 물음에 답할 자신이 없어서 옮겨온 침대 시트아래에 새로 깐 욕창방지매트를 꾹꾹 누르기만 했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눈을 뜬 엄마가,

"하나가.. 하나가.. 없어.. 하나가 안 와." 

"이상해. 이상해. " 한다.

"어? 하나가 없어? 누가 없어? 누구 데려올까?

누가 보고싶어? 이모 데려올까?"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 하는 엄마에게

"차서방은 저번에 엄마 정신없을 때 응급실로 왔고, 문서방은 아래께 왔는데 엄마가 문서방 몬 알아 봤다고 속상하다고 울다가 갔대. 기억 안나?

어제키 커다란 이서방도 와서 앉아 있다 갔잖아.

엄마가 누군지 모르겠다 했잖아." 하며 말걸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떨어대도 엄마 눈빛은 멍하니  나를 뚫고 지나가며,

"모르.. 겠.. 이상해. 이상해. 하나는 어디갔어?"

하는 엄마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나는 불현듯 그 없어진 하나가 아빠인가 싶었다.

"아빠? 아빠가 없어?어?엄마 남편?우리 아빠?" 하니 엄마는 더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 남편.. 도 있어?" 한다.

"엄마 남편 이태길씨 있었지. 우리 아빠. 키 크고 잘 생겼잖아. 근데 지금은 없어. 엄마 혼자 냅두고 저번에 먼저 가버렸잖아." 하니 눈더 힘주어 뜨면서 도데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가써?하나가.. 이상해.."

아빠가 가버린 사실을 잊은 건지, 아빠와 결혼한 사실을 잊은 건지 마는 또 어디쯤 있는지 모르겠

어서 더 안타까운 건지 모르겠다.


낮동안 주로 엄마와 있는 큰 언니의 얘기로는 요즘 엄마의 정신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단다.

피난 오던 시절 얘기를 한번씩 한단다. 그럴 때는 서울말까지 쓴단다. 아직 엄마의 정신이 우리들에

까지 이르지 못했나 싶어 조급하게 또 다시 한번 물어본다.

"나, 누구야?" 하니 엄마는 또 빤히 쳐다 본다.

"나 경이야? 진이야? 누구야? 주야야?" 하니

주야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확인하고 그저서야 안도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런 걸 물어보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알아 본다. 다행이다.

"안아. 안아." 하면서 다리를 올려 달라한다.

앞 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 한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레싱을 하는 종아리 화상상처가 의식이 돌아오면서 꽤나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다리에 예민했다. 




늘 담담던 오빠가 무너졌다. 

주로 야간에 병원에 있는 오빠가 밤에 특히, 새벽녁에 불쑥불쑥 통증이 찾아 오는 엄마를 지

보고 있었다.

1068호 병에서 서너 날이 지난 어느 날,

오빠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전에 홀로 바닥에 발을 딪을 의지가 없는 엄마를 지켜보며 멘탈이 나갔던 나처럼 오빠도 살짝 정신줄을 내려  듯 했다.

새벽녁에 느닷없이 나를 죽여 달라고 악다구니치는 엄마를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무 것도 해 줄 없는 우리들 처지도 엄마만큼이나 엾고 답답했다. 그런 고단함 오빠는 힘겨워 했다. 빠에게서 지친다는 말이 처음 나왔다. 언니들도 나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있어라. 피곤한 데 자꾸 용을 쓰고 뭐를 할라, 지친다. 내 아침에 일나는 대로 갈테니 그냥 좀 자라. " 나는 이렇게 위로 했고 작은언니는

"지금 내 갈까? 집에 가서 좀 래?" 했다.


오빠는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는 고단함을 이겨내려고 무어라도 하려고 용을 쓰는 것 같았다.

욕창이 생길까 스스로 돌아눕기 힘든 엄마의 몸을 시간 시간마다 이리저리 돌려 뉘였고 다리가 부으면 다리를 올려 마사지하고 혈압이 떨어졌다하면 머리를 히고 손을 주무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했고 우리에게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엄마가 편안해 한다고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느라 오빠는 몸도 지쳤지만 몸을 지탱해주던 정신이 지치니까 같이 흔들렸다.

다행히 오빠는 다시 몸을 고단하게 움직이는 방법으로 스스로 마음을 추스렸지만 오빠의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에 큰 바위가 꽝 하고 떨어져 파도가 넘쳐 올라 우리들의 단단한 팀웍을 휩쓸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단단히 간직한 우리집 행동대장 작은언니는 그다음날인가 그날인가 낮에 의사와 얘기를 하다 말기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추천을 았고 바로 담당자와 상담을 했다. 그리고는 호스피스병동의 장단점을 우리 모두와 의논했다. 혹시나 해서 엄마의 마지막 형제인 이모섭섭하게 여길까봐 이모에게도 진지하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 갈 수 없다면 병원에서 가장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의사가 요양병원을 추천도 했다지만, 코로나시국

에 면회도 힘들다하고 또 이제와서 다른 환경에 다시 엄마를 노출시키는 일도 무모한 일같았다. 요양병원보다는 대학병원의 의사님들이 엄마를 살피는 것이 당연히 나을 인데, 또 이렇게 시간이 일주일가량 지나면 갑자기 병원에서는 더 손 쓸 방도가 없다고 퇴원을 하라할까 봐 겁도 났다.

그렇다면 퇴원강요없이 임종의 순간까지 대학병원

의 교수진의 손길을 받을 수 있는 호스피스병동도 현실적으로 세상의 인만큼 잔인한 곳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병원에 남자 호스피 병동만 있었는데 여자 호스피스 병동을 지난 달에 새로 만들어 현재는 입주한 환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귀에 쏙 들어왔다. 호스피스 담당 교수가 간호사와 전공의들을 댓 명씩 이끌고 수시로 엄마자리로 내려 와서 정성껏 모시겠다고 홍보 활동을 펼치고 갔다. 호스피스담당 교수 이 병원 내의 암센터, 센터장으로 이 분야의 권위있는 교수님이라 했다.


호스피스 병동을 미리 보여주는데 10층 내과

병동의 가장 안쪽 조용한 고 샤워시설이 있는 화장실이 넓직하니 자리하고 시설도 여짓껏 본 병동 중에 가장 깨끗했다.

무엇보다도 일단 당분간은 우리만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 마음에 들었다. 가끔  정신줄놓고 소리지르는 엄마 마음껏 소리

치고 억울함을 풀어 놓을 수 있음 되었다 싶었다.

또 나도 엄마한테 남은, 아직 못다한 얘기들이 너무 많았다. 슬픈 속내들을 편히 다 꺼내어 이 가엷은 엄마와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엄마는 오려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긴 뒤 더 고요해

졌다. 렷한 정신은 아니지만 이 모든 상황을 엄마가 어찌받아 든일지 몰라서, 의사나  간호사

들에게 엄마 앞에서는 호스피스병동에 대한 언급은 하지 말아 달라고 혹시나 눈을 감고 잠들어 있을 때라도 부정적인 단 하나도 얘기는 하지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든 간호사든 흔쾌히 당연하다고 했다. 병동을 옮겨 가면서는 엄마한테는 엄마가 좋아하는 창가 쪽 자리가 생겨서 그리로 옮겨 가는 거라 했다. 정신이 어디쯤에 있는 지 잘 모를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병원에서 일어나는, 엄마의 신변에 관한 일들은 가능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었다.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기고 나니 담당 간호사 서넛이 번갈아 인사를 하러 왔다.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혈압과 혈당을 재고가는 학생 간호사들 뜸 한 듯 했지만 눈에 익은 연차가 높은 간호사들은 수시로 와서 쨘한 눈빛으로 엄마를 살피다가 갔다.

둘째 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로 머리를 감기는 놀라운 기술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역시 전문가들은 달랐다. 전에 보던 간병인들은 사실 우리들보다 야무지지 못 해 보였는데, 이들은 착착 엄마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 나가는 듯 했다.

그러면서 보호자인 우리들의 식사며 간식도 챙겨 보내기도 했다. 정하기 그지없는 병원 생활에서 이런 약간의 호의가 몹시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엄마가 점점 죽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다.

다리 화상으로 감은 붕대 때문에 자꾸 누가 엄마의 다리를 꽁꽁묵어 두었다고 의심하는 엄마를 안심

시키려고 몇 번을 엄마 다리사진을 찍어서 보여 줬다.

"엄마, 묶어 둔게 아니다. 엄마 저혈압으로 쇼크

와서 의식 잃었을 때... 혈압 올린다고 다리쪽으로 열을 쏴대서 다리가 다 디었다." 숨 한번 고르고

"그래가 다리에 약바르고 붕대 감아 났지." 하고 차근히 설명해주면 또 다시 의아스런 표정으로

"근데 나는 왜 몰랐어?" 하는 엄마를 안심시키고 내마음도 추스르려고,

"그러게.. 아프다하지. 왜 가마있었어." 하며 속이 상해 애꿎은 엄마의 다리살을 자꾸 스다듬었다.

"나... 인제 못걸어?" 하며 엄마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다리.. 들어.. . 들리..?" 한다.

엄마 다리를 끌어안고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봐봐봐. 다리 잘 움직인다. 걱정마라. 약발르고 다 나으면 뛰어다니자." 


잠시 편안한 표정이더, 곧 이내  다시...

"나 묶인 거야?나 왜 묶었어? 다리가 안 움직여져." 라며 레파토리가 서너번 돌고나서야 엄마는 잠이 들었다.

그래도 처음 병실로 올라왔을 때보다는 말이 많이 늘었다. 반나절이 다르게 말하는 법이 늘어났다. 어눌하게 단어를 나열하던 대화들도 이제는 그냥 서너살 애기같은 말투이긴 하지만 의사표현은 거의 가능해 졌다. 간간히 제 정신이 돌아오면 울적하게 돌아누워 눈을 감고 있었지만 죽여달라고 소리지르

고 악다구니를 쓰지는 않았다. 그럴 기운이 없어 보이기했다. 찌되었던 이렇게 또 이겨내 주어

서 감사했다. 이렇게 또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어주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병원 창 너머로 바깥 세상에서는 지고 있는 노을이 저녁하늘을 신비로운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 보는 엄마에게 창 너머로 비친 하늘말고 진짜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지막 입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