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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Dec 03. 2021

마지막... 바람이 분다.

죽는 일상의 기록(9)

마지막... 바람이 불었다.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딱 3개월 째 되던

8월 27일 금요일 15시 11분에 엄마는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다시는 숨을 쉬지 않았다.

마지막 입원 후, 여러 차례 정신줄 놓으며 제발 나를 죽여 달라고 소리치며 겉으로도 죽음에 태연한 척하고, 엄마의 엄마한테 가고 싶다고 떼를 쓰며 속으로도 죽음을 익숙하게 언급을 하더니,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 간 지 딱 4일째 되던 날 우리들을 떠났다.



임종의 순간은 오빠와 함께였다.

우리들은 그 순간을 함께할 기회가 없었다.

그넘의 망할 코로나 덕분에... 엄마가 떠나던 날 우리들은 코로나 검사 음성확인증을 구하러 뛰어 다녔다.

이틀 전에 인근에 있던 K대학병원에서 간병인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가 의사, 환자, 보호자까지.. 그 병원내에 대략 200여 명까지 전파가 되었다는 소식으로 우리 지역 전체가 떠들썩했고 뉴스마다 난리였던 지라,

우리가 있던 Y대 병원도 간호사들이며 병원 시큐리티분들이 모두 내일부터는 코로나음성

확인서가 없으면 아무도 병원 내에 출입을 못 한다는 날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 4남매는 사실, 언제고 일어날 수 있을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일찌감치 코로나 백신접종을 2차까지 완료했는 데도 말이다. 어쨋든 엄마를 홀로 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병원과 싸워본들 승산없는 게임은 나설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병원의 지침을 최대한 따르면서 바삐 움직여 다같이 코로나 음성 확인증을 들이밀기로 했다.

그러느라 작은언니와 나는 그날 낮 12시까지 현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가장 빠르게 음성확인증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느라 정작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가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엄마 병원에 가려고 코로나검사 기다리는 줄에 서 있으면서도, 불과 3시간 뒤에 엄마를 영영 볼 수 없게 될 줄 상상도 못 한 어리석고 안타까운 우리들이었다.


호스피스병동으로 가게 되면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하나가 임종서비스라고 의사와 호스피스 담당 간호사들이 그렇게 자랑했는데, 임종의 순간에 48시간을 함께 조용한 곳에서 마지막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는 임종서비스를 누릴 새도 없이 엄마는 오빠와 단둘이 있을 때에 떠났다.

묘금도 유씨로써 마지막 남은 엄마의 피붙이인 이모가 다녀간 지 2시간 만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에 이모를 보고 가서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했고 정작 이모는 내내

"나를 보고는 작정하고 떠나 버렸다."고

"내, 너거 엄마가 그럴 거 같아서 겁이 나서 병원도 못가겠더니... 괜히 그 날에 병원을 갔나 싶으다." 하며 한참을 못내 아쉬워하고 책망했다.

이모는 우리들이 코로나 음성확인증을 구하러 비운 두  시간을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 비록 정신은 왔다갔다하지만 엄마 평생의 단짝친구

이자 엄마의 반짝이던 생까오롯히 간직하고 있을 이모와 작별의 시간이 주어졌음이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나는 초등부 수업이 한 타임 반이 끝나가고 한숨을 돌리며 중등부 수업에 올 학생들을 기다리다 작은언니의 울부짖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금방 가버렸다고 수화기 너머 언니는 거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비명같은 외침이 들렸다. 나도 정신이 아득해져 왔지만, 언니의 코맹맹이 외침소리에 오려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차리자.

"언니는 지금 어디고? 병원에는, 지금, 엄마 옆에는 누가 있냐고? 언니야, 정신차리라. 언니야... 병원으로 지금 갈까?" 하고 나는 생각보다는 침착하게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다. 아니다. 지금 병원에 아무도 몬 드간다. 젠장. 못 들어가게 한다잖아. 우야가 지금 병원 안에 있고. 지금 나는 문서방이랑 병원으로 가는 길인데. 가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옮기야 되는 상황이란다. 일단은 가서 상황을 보고 연락을 해주께. 큰언니가 연락이 안된다." 하고 작은 언니의 정신없이 울리는 소리들이 왕왕왕 들려

왔다.

"알았다. 알았다. 언니 정신 차리고. 큰언니는 내가 계속 연락하께. 병원 도착하는대로 연락도고."

큰언니도 구미 어디선가 음성확인증을 찾아 다니고 있을테지.


 베란다에 문짝에 기대어 잠시 서 있었다.

크게 숨을 몰아  한 숨을 고르고 억지로 억지로 마음을 눌러 놓았다. 일단 나의 일터돌아 왔다.

세 명의 초등학생이 아직 20분 가량 더 수업 시간

 더 남았음을 확인하고 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하지만 이내 볼펜을 집어 들 수도, 아무 생각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음을 깨달고 하나씩 아이들의 책을 챙겨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5시쯤 올 중등부 학생 5명에게 서둘러 문자를 보내 오늘 수업은 선생님 개인 사정으로 못하게 되었다. 저녁에 부모님들께 따로 안내를 드리겠노라... 고 연락을 했다.

거기까지 간신히 정신을 차려 일처리를 하고서는, 그 이후에는 그대로 쇼파에 주저 앉아 버렸다.


한참을 마치 현실이 아닌 듯, 멍하있으니 마침 집에 있던 9살, 아직은 몹시 정신이 없는 아들 녀석

다가 오더니 먼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엄마 무슨 일이 있어? " 하며 무릎에 안킨다.

"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하니, 이 아무생각

도 없는, 죽음이 먼지 감도 못 잡을 녀석이 갑자기 나를 안고서는 목청껏 크게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외할머니, 요새는 많이 보지도 못 했는데... 어엉 어엉엉... 외할머니 다 나으면 할머니 집에 놀러 갈라 했는데..  그럼 이제 다시는 못 보거야? 어어엉."

하는 이 정신없는 9살 녀석에게 안겨 그제서야 그녀석의 목청에 나도 마음을 내려 놓고 한참을 흐느꼈던 것 같다.

사실은 그 잠깐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가 않는다. 흐느끼며 남편에게도 연락을 했고 남편이 가만 아무것도 하지말고 있으라고 자기가 집으로 갈테니 같이 움직이자고 기다리고 있으랬고, 큰 딸에게도 문자로 하교 후 바로 귀가해서 집안과 동생들을 돌보고 있으라 했다.

그러다 큰언니랑도 연락이 닿았다. 큰언니도 처음엔 작은언니에게 연락 받은 나처럼 목소리가 담담했던 거 같은데, 통화를 마무리하며 들려 오는

"좀 만 더 있지. 담주에 엄마 생일에는 우리랑 같있다 가지..." 하는 언니의 넋두리흐느낌이 묻어 나와서 나는 간신히 9살 아들 녀석의 손을 쥐고서 겨우 붙들고 있던 나의 평점심이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 또 혼자서 엄마의 마지막을 지켰을 우리

 중에 젤 보드랍은 오빠가 올랐고 혼자서 어쩌고 있을지 몰라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이 도착하자말자 어디로 가야 할 지도 없이 그냥 병원으로 출발하는  가는 도중에 작은언니가 장례식장 위치를 전해주며 그리로 바로 오라 했다. 아, 내가 가기 전에는 엄마는 못 보내

는데 아무도 엄마를 건드리지 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내가 가면 엄마는 다시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가 빨리 가야 하는데, 그 길을 내가 가서 잡아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금요일 저녁이라 잔막혀 있는 상인동 어느 사

거리 풍경을 한참을 멍하니 내다보다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엄마랑 자주 가던 백화점이 코앞에 있는데 지금 엄마는 어디 있는거야. 

"불쌍한 울엄마, 가엷은 울엄마...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어디로 간거야. 좋은 것, 뭣 하나제대로 누리지 못 하고.." 라는 생각 머릿속에 가득 들어앉진짜로 너무 쨘하고 가여워 빠진 엄마의 일생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아,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 아, 그냥 엄마가 불쌍해 미치겠다. 이렇게 떠나려는 엄마가 너무 가엷다. 그것말고는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길고 긴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례식장의 긴 복도를 지나가면서도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사무실이라는 글씨 너머에 절차를 상의하고 있는 듯한 엄마에게는 늘 아들같았던 작은형부와 엄마의 하나뿐인 여린 아들, 오빠의 머리꼭대기들이 보였지만 애써 마주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사실이 아닐꺼야. 믿기지가 않잖아. 이건 아니야. 어흐흐흐 거리며 주먹을 꼭 쥐고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헤매는 아기처럼 그 긴 복도를 하염없이 걸어 갔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은데 직접 눈으로 보아도 믿을 수가 없을 텐데... 이게 다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

인데.. 어제 밤까지만 해도 나랑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고 있었는데.. 하는 생각들이 머리속을 둥둥 떠다녔다.


가장 끝 방에서 엄마의 담요를 꼭 끌어 안초점

 눈으로 멍하앉아 있는 작은언니가 보였다. 작은언니는 나를 보더니,

"오늘 아침에 내가 엄마 담요를 새로 바까놓았거든. 그거 덮고 있었는데, 근데 엄마가 가버렸어."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나에게 애기처럼 얼거렸다.

나는 작은 언니를 위로하려 곁에 앉았다가, 엄마가 저 방 건너편에 있을 거 같아서 엄마는 도대체 어디있냐고 눈에 보이지가 않는데 내가 보질 못 했는데 엄마가 가다니... 어디를?

엄마가 막냉이를, 나를 안 보고 어디를 혼자 갈 리가 없는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다며 계속 여기저

를 서성거렸다.

"마, 디있냐고!!"

문을 열면 거기에 있을거 같 빈 식장의 문을 조리 다 열어 보았다.

지켜 보지 못한, 손잡아 주지 못한 엄마의 마지막 모습 현실로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지만, 또 사실 한 편으로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켜보았다 도 인정할 자신 아직다. 인정 할 수 없다고 더 잡아 보고 생떼를 더 부려볼꺼를 그랬나.



작은언니가 정신없이 병원으로 들이 닥쳤을 때, 오빠는 엄마의 짐을 마치 테트리스마냥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더란다. 마지막 입원이 거의 2주  되어가보니, 병원에 엄마짐이 한 짐이었다. 정신까지 왔다갔다하 마지막의 생을 잡고 있던 엄마를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기면서 오빠가

"인자 나는 1086병실로 완전 이사다" 하며 집에서 쓰던 엄마이불이며 엄마 베개, 또 오빠의 급한대로의 살림살이까지 몽땅 싸들고 와 있던 중이었다. 그러니 짐이 짐이, 정말 작은 이삿짐 수준은 되었다.


나중에서야 오빠보러 언니들이 엄마를 보내고 혼자서 짐을 깔끔하게 정리해둔 남동생에게

"이자식, 이거 완전 또라이데이~ 쌍또라이. 싸이코패쓰야." 하고 놀려 대었더니

그간 그때 얘기 한 마디도 안 하던 오빠가

"그 넘의 병원, 내가 다시는 안 간다고. 다시 꼴도 보기 싫다고 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꾸역꾸역 몽땅 야무지게 싸났다." 하며 

"간호사가 짐은 나중에 다시 챙기러 와도 된다는데 아니라고 기어이 혼자 앉아서 다 쌌다. 다시는 이 병원으로 발길은 커녕 고개도 돌리기 싫다고 오기로 짐을 다 싸놨뿟다. 내가... " 라고 했다.


그렇게 힘겨워 하던 시간들에 비해 진짜 마지막 순간에 엄마는 너무나도 고요하게 갔단다.

사실은 함께 있었던 오빠도 눈치를 못 챌 만큼.

점심나절에 온 이모를, 간호사들이 면회금지라며 하도 눈치를 줘서 돌려 보내고엄마도 한번씩 눈을 깜빡거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그 며칠 동안의 여느 때처럼 그렇게 고요히 있었단다.

압을 재러 온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오빠와 잠시, 늘처럼 밤새 컨디션은 어땠는지 소변량, 수면상태 등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돌아다 보니 숨이 멎어 있더란다. 간호사도 하얗게 질려서 환자분 호흡이 멎었다고. 맥박도 갑자기 잡히지 않는다며 급하게 의사를 호출했고 그러고도 의사며 간호사며 정신없이 다녀갔는데 그후로 엄마는 영영 눈을 뜨지 못 했다. 

그렇게 아팠던 거치고는 마지막은 참으로 고요하여

서 다행이었던건지 그마저도 서럽기만 한 건 지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



나에게 전해진 엄마의 마지막 이야기는 `하나가 빠진 7` 였다. 수시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또 정신이 들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번씩 하던 엄마 기 전 날 밤에, 갑자기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나를 불러서

"일곱 개 들고 온나~" 했다.

엥? 갑자기 무슨 일곱 개를 가져오라는 건가 싶어 얼른 엄마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

"엄마, 엄마~ 일곱 개라고? 뭣을 일곱 개 가져

올까?" 하니 다시 정신이 새로 드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였지... 머..를.. 가... 와야...하는데.. 머지... 기억이.." 하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억이 안나? 모르겠어? 기억이 나면 나한테 꼭 말해줘."

입원을 하고 거의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서 아까 낮에 오빠가  맛밤을 들고 와 보, 하던 게 문득 생각나서

"엄마? 밤줄까? 밤 으깨서 먹어보까? 오빠한테 밤 7개 들고 오라하까? 먹어볼래?" 하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이상해. 기억나므... 말.." 하고 말을 맺지 못한다.

"알았어. 알았어. 기억나면 말해줘 갖다줄께." 하니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내가 가고 나서 새벽에 오빠랑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오빠보러는 귤을 7개 들고 오

단다. 오빠가 엄마한테 귤이 먹고 싶냐고 귤을 사올까하니 엄마가 한참을 가만히 빤히 오빠를 쳐다 보더니,

아니 ...너들 줄라고.

우리들한테 귤을 하나씩을 주고 싶어서 귤 7개를 들고 오라고 했단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일곱 개가 우리 4남매와 우리들의 배우자들... 이었나 보다.

첫째 경이, 둘째 진이, 셋째 우야, 막내 주야... 이렇게 우리 4남매와 큰 사위인 차서방, 둘째 사위 문서방, 막내 사위 이서방... 이렇게 합하니 일곱이 되네. 우리들 일곱이를 다 데려오라는 얘기었나.

날 밤에, 엄마는 엄마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우리들을 부른 것이나.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꼬 하나가 없다고, 왜 하나 없냐고 묻던 그 하나, 아직 싱글오빠는 왜 옆에 하나가 없냐는 것이었나보다. 

오지 않은 하나가 아빠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는 정신줄을 놓고의식을 잃 죽음의 문턱

 서있으면서 조차, 그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는 우리들이 걱정이 되었 보다.



장례식장에서 입관식을 하고 엄마의 제사를 지내는 비현실적인 슬픔이 몰려오는 순간에서야 

내 엄마에게 제사낼 때나 하는 두 번의 절을 처음 올리는 순간에 나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다. ㅡ  그 눈물 사이로 식장에 있던 상자가 눈에 띄였다. 제일 고 예쁜 거로 귤 7개를 골라 엄마 사진 앞에 올려 놓았다. 이제서야 엄마 가져다 놓은 귤 7개를 보며 엄마의 마지막을 계속 잊지 않으려 용을 써 본다.

우리 일곱이는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서로 위하

면서 엄마가 남겨 주고 간 몫까지 서로를 잘 보살피며 잘 살 갈. 이제 우리덜 걱정일랑 하지 마시좋은 데서 맘 편히 지내고 계시라고, 

이상은, 다시는, 다시는 절대 아프지 마시길 간절하게 기도해 보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렇게 죽을 만큼 아픈 일이는 것을 아는 데도 내 욕심에... 진짜 내가, 막내떼를 쓰고 욕심을 부

면서 엄마를 더 잡아 두느라 엄마가 더 아프고 더 힘겨웠을까...

사실 언니, 오빠들은 아프지 않도록 편히 보내 주고 싶어 했는데 는 그렇게도 놓치 못하고 엄마가 그렇게 아픈 데도 좀만 더 있자고 좀만 참자고 욕심리고 다그쳤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주야, 엄마 괜찮다."

하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의사님들은 독한 진통제로도 견딜 수가 없을 고통

이라 는데 막에게는 엄마는 늘 아프지가 않

 했다. 그저 눈빛으로만 엄마 이제 가고싶다. 하시던  엄마.

'아, 나는 안 괜찮다. 나는 진짜 못 괜찮겠다.

마지막까지 욕심부리고 아프게 그렇게 아프게도 더 잡아놔서 미안해. 막냉이는 엄마없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못하겠어서 그랬어. 이제는 다시는 아프

마.'

마지막 작별에는 아무리 참아 보려 해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바람이 부는데..

당신은 왜 살고 싶지가 않으신가를

원망하던 내 비좁은 상념들을 반성하며


바람이 분다

발레리님, 나는 또 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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