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굳이 내려 가던 계단을 다시 거슬러 올라 와 마치 지구를 지켜내는 막중한 임무라도 맡은 듯이 결연한 목소리로
"어~ 알게씀. 오늘은 내가 반드시 찾아오겠음!" 하고 손 경례를 하고 떠나는 녀석.
지난 주, 월요일부터 갑자기 찾아온 겨울날씨에 꺼내 입고 간 경량패딩이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바람막이 같은 얇은 잠바는 늘 스스로 여분을 학교에 비치해두고는, 방학하는 날이나 담임선생님이 대청소시키는 날에 얇은 잠바 서넛을 가방에 말고 질질 끌고 오는 녀석이긴 하지만.
경량이긴해도 부피가 에법 있을 패딩이 학교에서 민폐로 방치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내 속이 꽉~ 막히는 것 같다.
1학년 때 같으면 담임이나 관장님을 수소문해서 챙겨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겠으나 그래도 이제 2학년 형님이라고 스스로 챙겨다니라고 잔소리만 하는 중이다.그래놓고 저녀석의 거의 모든 외투와 티셔츠에 이름을 썼다. 맨투맨티셔츠도 수시로 벗어제낀다.
(사실은 몇해전 유치부때만 해도 바지춤이 질질 흘러내려 힙합스타일로 팬티선을 다 드러내고 귀가를 하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
삼남매가 모두 같은 유치원을 나온 지라 셋을 지켜본 유치원 원장님께서 3번은 정말 그집아이 같지않다고 했다. 셋다 성향이 각기 다르긴 하지만 야무지지 못 한 것은 3번 뿐이다. 막내라고 우리가 다 받아줘서 저 모양인가 깊이 반성중이다.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잠바와 티셔츠들도 있지만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잔소리한다.
필통, 연필, 지우개같은 자잘한 물건들은 아예 다 이름이 박혀 있는 걸로 구입한다.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었지만 한번씩 각잡고 필통 내놔보라 하면
"필통 없는데... 학교에 있는데..." 하며 귀찮게 머러 들고 다니냐는 의아한 표정이다.
삼남매를 키우면서 필통을 학교에 두고 다니는 녀석은 역시나 네 녀석이 처음이다.
"너 필통 속에 연필은 있냐?깎기는 하냐? 엄마가 오늘은 2학년 2반 교실에 쳐들어가서 교실을 싹 다 뒤져서 니 연필 싹 다 찾아올꺼다. 10자루는 넘게 있을 껄!" 하며 협박한다. 그러면 참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어른들은 우리 교실에 들어 올 수 없어. 2학년 2반 아이들만 들어 올 수 있지. 엄마는 입장불가... 띠~"
하고 뺀질뺀질거린다.
"내자리에 연필 다 있거든. 교실에 있는 연필깎이로 깎아서 쓰면 되거든요~"아, 엄마는 뭘 또 연필 한 자루에 집착하고 그르냐고 능글거리는 녀석. 아 놔.
사소한 연필 한 자루일지 몰라도 내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어른으로 자라야 한다. 이 좌이쓱아.
내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내 주변의 사람도 소중하게 여길 것이고 또 나자신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도 잠바 안 찾아오기나 해봐라."
특단의 조치를 계획해 본다.
정신머리는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3번 녀석과의 실갱이 이전에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미에 대한 실갱이가 끝나야 2번이 출동한다.
오늘은 특히나 졸업 앨범을 찍는 날이라고 촌스럽지 않고 10년, 20년 뒤에도 흑역사가 되지 않을 완벽한 미를 추구하느라 아침 나절에 한껏 까칠하게 굴었다.
앞이마의 가르마를 정확하게 갈라달라는 요구로 부터 시작하여 여드름패치는 어딧냐, 뒤쪽 머리의 세팅은 미덥지않지만 엄마에게 부탁한다더니, 새로 사서 택도 떼지 않은 내 연보라색 니트를 입고 나선다. 브랜드상호나 로고가 프린트 된 맨투맨 티셔츠는 나중에 잿민이시절의 브랜드로 오해받을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아무 프린트가 없는 니트가 졸업앨범 의상으로 적당하단다. 저 맨투맨을 사달라고 그래 졸라 놓고 지옷은 고이 모셔둘 모양이다. 딸들때문에 브랜드도 아니고 보세도 아니고 얘들의 정체가 뭐냐고 못내 못마땅한 무신○에 나는 vip회원이 될 판이다.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하고 나서면서 지난 주에 택배로 고이 받은 내 새 라코○○ 운동화에 발을 살포시 끼우신다.
새 학기가 되어 새 운동화를 사러 나선 딸들에게 내가 저 운동화 예쁘다고 발 사이즈가 같은 두딸 모두에게 저 것을 사서 공유하자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엄마 취향으로 낙인 찍히며 냉정히 거절당한 운동화 되시긋다. 그래놓고 또 구질구질한 삼남매 어매는 내것으로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라며 운동화는 잘 신지 않는데 하면서 다시 두 어 달을 벼라서 인터넷 최저가로구매 성공 후, 지난 주에 받았는데 이쁘다고 나의 안목을 인정만 해줬어도 흔쾌히 빌려 줄 터인데... 치잇. 기분이 나쁘지만 또 그러려니 하고 살포시 끼워넣는 발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내 새 것들을 착장하고 나서는 2번이 현관 앞에서 나서기 직전에
"엄마, 다이소같은데가서 줄 이어폰 좀 사놔."한다.
"엥?버즈는 어쩌고 줄이어폰을 왜?"
"몰라. 음악선생님이 들고 오라는데, 무선이어폰 잊어버린다고 줄이어폰 들고 오래." 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다.
"야, 요새 줄이어폰있는 애가 어딨노? 참내 멀쩡한 이어폰두고 또 새로 사야 되나."
"내말이... 안 그래도 우리반에도 줄이어폰 없는 애들이 더 많다 했어. 암튼 오늘 사놔야 돼. "하고 나섰다.
아직도 아이들의 현실과는 살짝 거리가 먼 학교다. 목요일에 운영위원회서 어디 견학간댔는데 그 바람에 참석 신청을 했다.
지난 1학기 회의 때 강력하게 요구한 학교 등교길 개선 사업이 한 여름쯤에 착착 진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운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거리에 과속방지카메라도 커다랗고 티나게 설치가 되었고 좁디 좁아서 비만 오면 중딩이, 초등이과 우산들이 서로 얽히고 설혀 난리가 나는 사거리 모퉁이의 인도도 대략 2배 정도 확장이 된 것을 보고 올해가 마지막인 운영위원회 활동도 재임이 가능한가 물어 볼 참이었다. 오지랖은 1도 없는 개인주의적인 인생이었는데 삼남매덕에 동네 아이들이 다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홍반장같은 인생이 되었다.
두 배는 넓어진 등굣길. 저 울창하고 으슥하고 통행에 방해만 되는 나무들은 도저히 어찌 못하는가, 다시 의욕이 생긴다.
그로부터 1시간 전에는 1번 고삐리가 쿨하게 나섰다. 아직도 맨 다리에 여름 교복 후레아치마를 착용한 채, 미모따위는 소나 줘버리라고 실용성만을 강조한 학교 츄리닝 잠바를 쿨내 진동하게 껴 입고는 문을 꽝 닫고 출동했다.
그나마 따슙고 하복보다는 간지가 살짝있는 동복치마를 입어보라고 조심스레 여러 번 권해 보았지만, 어차피 교문 통과와 동시에 체육복으로 변신할 꺼니까 갈아 입기 편한 후레아 하복이 낫다고 다시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10월에 하복이라니... 왜 저러고 다니냐고 속이 터진다고 저 아이와 꼭 닮은 아버지에게 뒷담을 깔려고 하면 (있는데서는 절대 앞담깔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비밀 유지가 되는 아부지한테만 속풀이하는 편.) 1번의 등굣길을 거의 매일 함께하는 아부지께서, 학교 앞에 가보면 370여 명의 18세 여자아이들 중에 진짜로 깔롱직이는 두엇 빼고는 다 저러고 있단다. 지극히 정상범주의 18세 여고생이라며 내비리 두라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이때껏 1번의 아침 등교를 책임을 지던 아부지 본인은 10월에 들어서면서부터 둘이서 아침내내 툭탁거리고 싸워샀더니, 드디어 결별을 선언하고 오늘아침부터 1번은 홀로 지하철 무료카드를 들고 문을 꽝 닫고 나섰다.
결별의 사유는 바쁠 게 하나도 없는 아빠가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 것을 알면서도 항상 느긋한 딸이 속이 터져서 재촉의 말을 몇 마디 건넸다가 딸의 승질머리를 감내해내느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달까.
헌데 정작 매사에 여유로움의 끝판왕인 아버지께서 당하는 일이니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하나 알 수가 없다. 중립을 지키겠어.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행동하는 둘이가 싸우는 꼴을 보고 있음 내 속이 터져서 중재에 나서려다 접기로 했다. 고마 둘이 잠시 헤어져 있는 것이 낫겠다며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둘은 서로 헤어져서 아쉬워져 봐야 소중함을 깨닫는 스타일들이시다.
세 녀석들이 다 나서고나서 당보충을 위해 달달한 믹스커피를 꺼낸다. 전기포트의 버튼을 누르고 쌍남자 녀석이 남기고 간 스콘에 쨈을 바른다.
그러고 있으니 요즘 코로나백수가 된 지 두 어 달 된 삼남매의 아부지가 아래께 끓여둔 소고기국을 데우며 "이거 먹어치워야지? 같이 먹을래?" 한다.
늘 그렇듯이 먹는 일에 진심이고 끼니는 참 다정하게 챙긴다. 가족 누구라도 끼니를 거르는 일이 가장 속상한 양반이다.
"아니, 나는 커피면 되었어. 혼자 잡샤."
오늘 서울간다드니 얼릉 나서면 좋겠는 내 마음을 좀 헤아려 주길 바라.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니 벌써 등교한 고삐리의 톡이 온다. 오전에 오는 너의 카톡은 겁이 난다리~ 어떠한 설명과 언급없이 간략하게 [택배받아놔.] 한다.그래, 쿨하고 뒤끝이 없단 게 장점이면 장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캐럿활동을 열심히하고 계신 18세 소녀.
몇 년째 17 걔네들을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본격적인 팬클럽 활동은 하고 계신 지는 눈치를 못채서 얼마 전에 발견한 캐럿 회원증을 보고 몹시 현타가 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물어보지 않았다.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해 본들 안 할 아이도 아니고, 나름의 취미생활로 인정해줘야지 어쩌겠어.
사진첩이 또 나왔나보다. 재네들은 노래는 안하고 당췌 사진만 찍냐...속으로 툴툴거리며또 택배 빈박스 모아놔볼까 싶다. ㅠㅠ
평범한 월요일의 하루로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착하게,
[알았어. 받아둘께.] 하고 답을 보낸다. 그래도 하트는 날리지 않았다. 마지막 엄마의 자존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