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귀한 마지막의 흔적(2)

내일 떠날 것처럼 오늘을 사랑하기. Well-dying

by 김순옥

퇴직은 오랜 세월 맡았던 수많은 직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동안 이어온 소중한 인연들을 마음으로 남겨두고 오직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 역시 퇴직 후, 관성처럼 바쁘게 이어오던 여러 모임들에서 잠시 물러나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충실하기로 했다. 덕분에 의무감보다는 진심으로 마음의 결이 닿는 다섯 분과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 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참 편안했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도 따뜻한 잔상이 가슴에 남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사이였다. 만나면 종종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만약 불치병이 찾아온다면 구태여 삶을 붙들려고 애쓰기보다,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받아들이자고 말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비관이 아니라, 주어진 생을 존중하며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고 싶다는 우리들만의 약속이었다.


모임의 멤버 중 한 분은 전직 교수님이었다. 선생님은 무언가를 나누는 그 자체에서 삶의 큰 기쁨을 찾던 분이다. 맛있는 음식, 좋은 것을 보면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늘 앞섰다. 품질 좋은 표고버섯을 박스에 정성껏 담아 오기도 하고, 영양 떡을 예쁘게 포장해 오기도 했다.


"좋은 거라 같이 나누어 먹고 싶어서 챙겨 왔어요."


환하게 웃던 그분의 얼굴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애정이 듬뿍 배어있었다. 스스로를 드러 내려 애쓰지 않았지만 그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헌신과 겸손이라는 향기가 은은히 남아있었다.


지난겨울 모임에 짧은 소식이 왔다.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참석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평소 누구에게 신세 지는 것을 미안해하던 성품답게,


"빨리 나아서 밝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게요."


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건넨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가족에게조차 투병 사실을 지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이야기는 훗날 전해 들었다. 그렇게 소식만 기다리던 10개월 만에 들려온 비보는 얼마 전 그분이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허망한 소식이었다.

평소 말하던 대로, 병마와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기보다 고요히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는 길을 택한 듯했다.


이제 곧 우리 넷은 다시 모이겠지만, 함께 웃음 짓던 그의 빈자리가 어느 때보다 깊게 다가올 것이다.

최근 잇따라 들려오는 유명인들의 부고를 접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실감한다. 죽음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었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내일 떠날 사람처럼 오늘을 살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후회 없이 사랑을 전하자.'


마음의 빚을 남기지 않는 삶.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삶, 그것이 먼저 떠나간 소중한 분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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