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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호 Oct 05. 2024

 휴식 수행




07    휴식 수행    /   김순호



  

    서울을 벗어나자 솜을 찢어 던지는 듯 굵은 눈이 허공에 분분하다. 목적지인 용문사로 가는 길은

어느새 한 차례 비질을 한 흔적 위에 다시 얇게 눈이 쌓이고 있다 늦은 오후여서 인지 들어가는 이

도 나오는 이도 보이지 않는 길엔 간간이 계곡의 굽이를 뛰어내리는 물소리만 가까이 다가왔다 멀

어지곤 한다. 배낭의 무게에 눌린 내 발걸음은 오르막에서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깊이 잠든 겨울 숲은 사르락 사르락 눈발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만 숨소리처럼 들릴 뿐. 첩첩 적

막이 안개처럼 스며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숨을 고르고 아이처럼 입을 벌린 채 쏟아지는 눈을

 맞는다.     ‘아. 진짜 혼자네 ’  만세를 부르듯 양손을 올려 자유의 기쁨을 확인하려는 순간 이내 입

술이 저 혼자 떨고 있다  '이게 뭐지?'

나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조차 소리치지 못하고 낮게  울먹이고 있었다.  세찬  눈보라가 쳐있는

설움을 알알이 부숴놓을 듯 얼굴을 이리저리 후려친다. 


    산사의 밤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른 저녁 공양을 마치자 급히 가방만 던져놓고 나왔던 방

로 되돌아와 창문을 열자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것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어둠

이 바람을 밀고 쳐들어온다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목을 내리칠 것 같은  섬뜩함에  급히 창을 닫고 블

라인드를 내렸다.


     가끔 찾아가긴 하지만 어느 절이든 스님들의 외진 별채 앞엔 예외 없이 "외부인 출입금지 묵언수

행 중입니다 "라는 팻말이 길을 막아 발길을 돌리게 한다. 나는 그때마다 스님들은 허구한 날 무슨 수

행을 저렇게들 하고 계실까? 의아해했다 그뿐. 별 관심 없이 지나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자연 속에서

템플스테이를 핑계로 며칠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예불에  구속되는 게 싫어 생각조

차 안 했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형 템플스테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

다. 나는 며칠을 망설이다 뒤죽박죽 들끓는 것들을  가라앉히고  오리라 기대하며  예약을 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그 야무진 뜻과는 달리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나의 몸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방에  홀로 갇히자 폭발하듯 울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이래서 스님들은 일 년 내내 "수행 중입니다".

란 팻말을  세워 두었던 것일까?


     옆방의 웅성거림도 잦아들고 산사의 밤은 더욱 무겁게 깊어간다. 방에 누워 책만 읽다 온들 뭐 

떠랴 란 마음으로 가지고 온 두 권의 책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와 (오규원 시인의)

< 두두 >를 앉은뱅이 탁자에 올려놓았다 새벽 예불 목탁 소리가  들릴 때까지 밤을 새워 읽는 호사스

런 체험을 하리라 들떠 있었던 출발 전의 흥분을 상기하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장을 펼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여 살아남는다. 는 말처럼 넘겨지는 페이지 수만큼 차츰 마음이 누그

러져 간다. 하루 더 묵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운다


        고립된 절간에서의 밤은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고요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불빛만 없다면 

‘무덤 속의 고요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하며 방안 가득 살아있는 고요 속에서 나는  죽음을 그리워했다.

치장된 거짓 자유로 취하고 있는 휴식. 그것이 아무리 고독한 배회라 해도 나는 분명 누군가에겐 부러

운 여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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