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중얼거리느니 쓴다
08화
실행
신고
라이킷
10
댓글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김순호
Oct 05. 2024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08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 김순호
아침저녁 온도 차이를 카디건으로 해결했는데
내일은 쌀쌀해진다니
입을만한 게 뭐가
있나
서랍
속 옷들을 몽땅 끄집어내다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양면조끼를 발견하고 들
어 올
렸다
이걸 잊고 있었구나
두 딸이
용돈을 모아 생일선물로 사준 조끼를
" 엄마 이거 굉장히 비싼 거야 "
"부드럽지? 만져봐. 진짜 좋은 거야 "
유난히 옷의 감촉을 따지는 나에게
두 딸은 앞다투어 얼굴을 들이밀고 종알 댔다
그리곤 조
끼를 펼쳐 보이며 빨리 입어보라고 신이
났었고. 짐작컨대
자매는 쇼핑을 하면서도
"짜잔"
하고 엄마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즐거웠을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낡은
조끼는 내손에서 힘없이 주르륵 바닥에 떨어져 뒹
군다
얼
른주워 뜨거워지는 눈을 깜박이며 입는데 금세 온기가 전류처럼 퍼져나가고, 애들의 쪼잘 대
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그리움이 회오리친다 아, 그때가 있었지
지난 생일에 큰 애는
"엄마 요즘엔 다들 선물보다 현금을 좋아한데" 하면서
돈이든
봉투를
건넸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이다 온 나라가 들썩 거려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힘들
고 민
망한 달이다.
부모는 뭔가를 받아야 제대로 된 자식을 둔 것 같고
자식은 자식대로
누구네는
자식들이 뭘 해줬다.라는 비교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부담스러운 5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엄
마
아빠 생일이 한 달 걸러 찾아오는 가을에
딸애는 가벼워지는 주머니로
또
한 차례 뒤척
이
리라.
작은애는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고
큰애도 독립해 우리 곁을 떠났지만 같은 서울에 살
기
에 찾아오는 건 큰애인데
불쑥 들어설 때마다 마치 내 영혼과 마주치는 듯 놀라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들
까지도
"와 진짜 엄마를 꼭 닮았네"라고 말을 건네오면
난 뭔가 결
핍을
물려준
것
같아 늘 불편하다
그것이 외모이던 무능함이던,
만지면 녹아버릴 것 같던 딸애가
폭발할 듯 피어났을 땐 " 나도 저렇게 예뻤을까 " 하며
내 젊음을 몽땅 훔쳐간 것만 같아 질투를 했다.
대학생이 된 딸이 처음 미팅을 하던 날,
나는
큰애를 화장대 앞에 앉혀놓고 엷은 화장을 해주었다.
그리고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당시 유
행
했던
지금생각하면 럭비선수같이 어깨가 떡 벌어진 촌스러운
뽕이 두둑이 들어
간 내 재킷
을 입혀 거울 앞에 세우고 이리저리 살폈었는데. 그땐 젊은 날의 내 모습 그대로가 자랑 스러
웠다.
"우리 딸 예쁘다"
"오늘 녀석이 누군지 모르지만 애프터 신청 안 하면 눈이 삔 거네 "
키 큰 딸애의 턱밑에서 올려다보고 웃으며 응원의 말을 해줬다.
내가 아끼던 긴 끈이 달린 작
고
까만 핸드백을 메고 총총히 대문밖으로 사라져 가던 모습,
그날밤 큰애는
"엄마 애프터 받
았어"
하며 싱글벙글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이후에는 내 옷과 핸드백 액세서리를 제 것
인 양 가
져갔고
나는 딸애의 청춘이 내 것이라도 된 듯 함께 젊음에 취했다.
이제 중년도 지난 늙은 엄마를
딸애는
수없이 훔쳐보며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
런
딸
을 향해 당당히
" 그래도 엄마 닮으면 곱게 늙는 거 아니니?" 하고 한마디 던져주고 싶은
데
왜
말은 안 나오고 기가 죽는지,
딸이 점점 나를 닮아 간다는 것은
그 애 또한 세월을 타고
뒤
쫓아
오
고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언뜻 차창을 스쳐간 앙상한 미루나무에 빈 까치집 하나 걸려있다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처럼.
keyword
공감에세이
글쓰기
Brunch Book
중얼거리느니 쓴다
06
필사
07
휴식 수행
08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09
열차는 들판을 질러가고
10
나가는 글
중얼거리느니 쓴다
김순호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10화)
김순호
소속
직업
출간작가
인생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지만, 은둔의 '글'쓰기 의식으로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구독자
6
제안하기
구독
이전 07화
휴식 수행
열차는 들판을 질러가고
다음 09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