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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호 Oct 05. 2024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08  빈 나무엔 바람도 머물 수 없어라    /     김순호



     아침저녁 온도 차이를 카디건으로 해결했는데  내일은 쌀쌀해진다니 입을만한 게 뭐가

있나 서랍 속 옷들을 몽땅 끄집어내다가  밑바닥에 깔려있는 양면조끼를 발견하고 들어 올

렸다 이걸  잊고 있었구나  두 딸이  용돈을 모아 생일선물로 사준 조끼를


" 엄마 이거 굉장히 비싼 거야 "

"부드럽지?  만져봐. 진짜 좋은 거야 "

유난히 옷의 감촉을 따지는 나에게 두 딸은 앞다투어 얼굴을 들이밀고 종알 댔다 그리곤 조

끼를 펼쳐 보이며 빨리 입어보라고 신이 났었고.  짐작컨대 자매는 쇼핑을 하면서도 "짜잔"

하고 엄마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즐거웠을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낡은 조끼는 내손에서 힘없이 주르륵 바닥에 떨어져 뒹군다

른주워 뜨거워지는 눈을 깜박이며 입는데 금세 온기가 전류처럼 퍼져나가고, 애들의 쪼잘 대

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그리움이 회오리친다  아, 그때가 있었지

지난  생일에 큰 애는 "엄마 요즘엔 다들 선물보다 현금을 좋아한데"  하면서 돈이든  봉투를

건넸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이다 온 나라가 들썩 거려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힘들고 민

망한 달이다. 부모는 뭔가를 받아야 제대로 된 자식을 둔 것 같고  자식은 자식대로  누구네는

자식들이 뭘 해줬다.라는 비교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부담스러운 5월,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빠 생일이 한 달 걸러 찾아오는 가을에  딸애는 가벼워지는 주머니로  한 차례  뒤척

리라.


    작은애는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고  큰애도 독립해 우리 곁을 떠났지만 같은 서울에 살

에  찾아오는 건 큰애인데 불쑥 들어설 때마다 마치 내 영혼과 마주치는 듯 놀라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들 까지도 "와 진짜 엄마를 꼭 닮았네"라고 말을  건네오면 난 뭔가 결핍을  물려준

 같아 늘 불편하다 그것이 외모이던 무능함이던,


    만지면 녹아버릴 것 같던 딸애가  폭발할 듯 피어났을 땐  " 나도 저렇게 예뻤을까 " 하며

내 젊음을 몽땅 훔쳐간 것만 같아 질투를 했다. 대학생이 된 딸이 처음 미팅을 하던 날,  나는

큰애를 화장대 앞에 앉혀놓고 엷은 화장을 해주었다. 그리고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당시 유

했던 지금생각하면 럭비선수같이 어깨가 떡 벌어진 촌스러운  뽕이 두둑이 들어간  내 재킷

을 입혀 거울 앞에 세우고 이리저리 살폈었는데. 그땐  젊은 날의 내 모습 그대로가 자랑 스러

웠다.


"우리 딸 예쁘다"

"오늘 녀석이 누군지 모르지만 애프터 신청 안 하면 눈이 삔 거네 "

 키 큰 딸애의 턱밑에서 올려다보고 웃으며 응원의 말을 해줬다. 내가 아끼던 긴 끈이 달린 작

까만 핸드백을 메고 총총히 대문밖으로 사라져 가던 모습,  그날밤 큰애는 "엄마 애프터 받

았어"  하며 싱글벙글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이후에는 내 옷과 핸드백 액세서리를 제 것

인 양 가져갔고  나는 딸애의 청춘이 내 것이라도 된 듯 함께 젊음에 취했다.


   이제 중년도 지난 늙은 엄마를 딸애는 수없이 훔쳐보며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을 향해 당당히 " 그래도 엄마 닮으면 곱게 늙는 거 아니니?" 하고 한마디 던져주고 싶은

말은 안 나오고 기가 죽는지, 딸이 점점 나를 닮아 간다는  것은 그 애 또한 세월을  타고

쫓아 고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언뜻 차창을 스쳐간 앙상한 미루나무에 빈 까치집 하나 걸려있다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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